관동대로를 걷는다 (1)

신용자의 길이야기

신용자 길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09/12 [22:18]

관동대로를 걷는다 (1)

신용자의 길이야기

신용자 길칼럼니스트 | 입력 : 2012/09/12 [22:18]


조선시대 9대로 중 제3로였던 관동대로는 서울 동대문에서 평해에 이르던 길. 다른 대로와 마찬가지로 보름여가 걸리던 천리 길, 수많은 사연들이 잠들어 있는 그 길을 설레임 속에 걷기로 하다. ‘우리땅 걷기’에서는 지난 4월 둘째 주말 평해읍(예전 평해 관아)에서 고천제를 지내고 관동대로 걷기의 대장정에 올랐다(매월 2째 주말).

강원도를 상징하는 관동(關東)은 철령관(鐵嶺關)을 중심으로 강원도는 동쪽에 있어 관동, 함경도는 북쪽에 있어 관북, 평안도는 서쪽에 있어 관서라 불렸다. 철령관은 그 지세가 험하여 3도의 기점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꿈은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것이었다. 독서로 맛 본 동해의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들어가 시를 짓고 유유자적 여행을 하는 것은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평생의 꿈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길이 바로 관동대로였던 것이다.

▲ 관동대로     © 신용자



사월엔 벚꽃이 만개한 꽃그늘을 걸으니 그나마 아스팔트로 변한 옛길이 위안이 되었다. 상상 속의 옛길을 떠올리며 걸었지만 울진, 삼척까지는 오르막이 심한 굽잇길이었다. 예전처럼 숲속으로 난 오솔길을 걷는다면야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을텐데…. 차도를 걸으려면 발바닥이 적응하는 고행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강릉까지는 7번국도와 겹치고 강릉부터는 영동선과 겹치는 구간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경북과 강원의 도계가 되는 삼척 갈령제부터 반가운 흙길이 남아있다.(관동대로의 끝인 평해 울진이 1963년 경북으로 이전되고 따라서 관동팔경의 망양정, 월송정도 시집을 갔다. 이 평해는 현재 울진군 평해읍이지만 1914년 행정 개편 이전까지는 평해군으로 조선시대 이산해, 김약행 등의 유배지였다.) 흙길이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관동대로 중 옛길로 남아 있는 곳은 삼척에서 강릉으로 오는 길 중 일부인 수로부인길(해파랑길)과 강릉의 대관령 옛길, 원주의 전재, 양평의 구둔재 등이 숨어있다.

 

삼척 수로부인길

길섶의 월송정과 망양정, 궁촌리의 공양왕릉 등을 들러보고 도착한 울진과 삼척의 도계, 4월 14, 15일엔 이틀간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걸어 울진원자력발전소까지 왔다. 5월 12일 울진원전에서 출발, 아스팔트 굽잇길을 오르내리며 도착한 갈령재, 관동대로 중 가장 긴 부분이 흙길로 남아있으나 지금은 해파랑길, 수로부인길 표시판들이 세워져 있다. 신라에서 명주로 오던 수로부인의 발자취가 어린 동해엔 헌화가를 비롯 바닷속 용왕을 만났다는 전설이 남은 곳. 예부터 강릉으로 오던 외길이었다고 한다.

▲ 수로부인길     © 신용자



이날은 오전에 14km, 오후에 13km를 걸었다. 오전에 3시간 반, 오후에 4시간 남짓 걸었으나 가장 행복한 걷기였다. 관동대로의 옛모습을 만끽할 수 있었기에. 황희 정승의 선정을 기리는 소공대비가 있는 소공령은 생선 임연수를 닮았다는 임원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위의 바닷길, 오르막길 입구에는 서낭당이 그대로 남아있는 사기막골이 나오고 마을을 지나 호산에서 용화리로 이어지는 옛길이 나타난다. 사실 대로라는 명칭이 붙었을 뿐이지 사신이 다니던 의주로 말고는 모두 혼자 또는 두셋이 다니던 소로였다,

일명 한국의 차마고도. 동해의 해산물을 이고지고 넘었던 고갯길이다. 주변의 가마싸움터는 시집가는 새색시가 탔던 가마가 오르막길에서 서로 길을 비키지 않고 밀어붙이다 결국 가마가 구르면서 새색시가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는 곳. 옛모습의 성황당도 눈길을 끈다. 그러나 혼자서는 못 넘고 여럿이 모여서만 넘었다는 아찔한 아칠목재는 정상까지 도로공사 중이었다가 중단돼 고갯마루의 신령스러움은 사라졌다.
 

▲ 성황당     ©신용자




느리게 걸으며, 한마을이던 포구가 도랑 하나 사이로 강원과 경북으로 갈린 고포와 나불메기, 작진 등 아름다운 포구를 들러보면 이틀코스로 적당하다는 이 길은 하루에 끝냈어도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바로 흙길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부는 길을 잃고 다른 길로 용화리에 도착하기도 했지만, 모두 만족하는 하루였다. 


▲ 동해를 보며 걷는 옛길     © 신용자


  

 

대관령 옛길

 

한양에서 나귀를 타고 이레가 걸렸다는 대관령, 나귀를 타나 걸어서 가나 하루에 가는 거리는 비슷했다. 아흔 아홉 굽이 높은 고개는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분수령이기도 하다.

날씨는 물론 고개 너머의 생활문화까지도 다르게 만들었으며 수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다. 해발 832m, 13km인 이 고개는 오르막이 30여분 더 걸린다. 일명 대굴령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조선 중종 때 강원관찰사로 부임한 고형산(1453~1528)이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관의 힘으로 열었다고 한다. 횡성사람이던 고형산은 지역민들을 위해 험한 고개를 정비했으며 대관령 개통문이 전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가 이곳을 통과해 서울로 진격, 적에게 길을 넓혀 침입을 유리하게 했다고 부관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관동대로의 반이 되었다는 대관령은 허균, 율곡 이이, 신사임당, 박제가, 김시습, 정철 등등 수많은 역사 속의 인물들이 넘었던 길이다. 관동대로에서 옛 정취가 잘 남아있는 곳으로 대관령박물관 입구를 지나면서 이어지는 길에는 계곡을 낀 아름다운 오솔길이 펼쳐진다. 제민원과 반정, 대관령을 지나 강릉단오제의 시발점이 되는 국사성황당에 이르니 굿소리가 한창이다.

푸른 숲 사이로 하얀 가르마처럼 이어지는 옛길은 오르막이라도 힘들기보다는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걷게 된다.

“와아!! 이런 길로 서울까지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길동무들은 행복한 상상 속에 대관령을 오른다. 예전엔 생활필수품들을 이고지고 혹은 과거를 보기 위해, 혼사를 위해, 유배를 위해 오갔을 것이다. 물론 유유자적 유람길에 오른 이들도 있었을테지만….

길은 걷는 자의 것이고, 아름다운 풍경은 한가한 사람의 것이라는 말들은 사실이다. 유월엔 강릉으로 오는 길에 길섶에서 농익은 산딸기를 싫건 따 먹었고, 더위에 어쩌나 싶었던 7월엔 다행히 비가 내려 안개 속에 평창을 지나 여우재를 넘을 수 있었다.
 

▲ 여우재     © 신용자



대관령을 넘어 횡계, 평창으로 이어지던 길, 길가의 어느 집 마당엔 탐스런 보리수가 무르익었다. ‘맛보고 가야지’ 라며 마당으로 들어서니 마루에서 해바라기를 하던 어르신이 반긴다. “우리 집엔 먹을 사람 없으니 다 따 먹고 가란다”.

평창 진부면 마평리 삼거리는 예전 주막거리였다. 청심대가 있는 곳, 오대천 벼랑 위 청심대엔 강릉 기생 청심이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묻혀있다. 강릉부사로 왔던 박 대감이 서울로 떠나갈 때 그곳까지 배웅을 나왔다 정든님을 보내고 뛰어내려 던 곳. 젊은 처자들은 사연을 듣자마자 대뜸 “가는 사람 ‘잘 가‘하면 되지, 죽긴 왜 죽어.” 이구동성이다.

이제 원주를 지나면 강원도 땅을 벗어난다. 얼마나 옛길이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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