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관문이었던 ‘석파령’ 옛길

신용자 길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03/12 [18:33]

춘천의 관문이었던 ‘석파령’ 옛길

신용자 길 칼럼니스트 | 입력 : 2012/03/12 [18:33]
▲ 석파령옛길     © 신용자


 

“어머!! 봄이 왔네.” 응달엔 눈길이 그대로이지만 물오른 나뭇가지들을 만지면 봄기운이 상큼하다. 도도록한 동백나무 꽃망울이며 진달래 가지들이 대지의 심장소리를 전한다. 꽃샘추위가 쉬이 물러나지 않지만 산하에 퍼진 봄소식은 둥글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타박타박 흙길을 걷는다면, ‘아름다운 산천은 한가한 사람의 것’임을 만끽할 좋은 계절이다.

석파령(席坡嶺, 350m)은 춘천의 관문으로 대표적 옛길이다. 신연강에 의암댐이 생기고 뱃길이 끊기기 전까지는 춘천 사람들이 왕래하던 춘경통로였다. 신연강을 건너 강길이나 새수고개를 넘어 덕두원 골짜기를 타고 들어가 시오리 고개를 넘으면 당림리. 그곳에서 안보역을 지나 서울로 가던 길이다. 삼악산 북쪽 능선인 이곳은 춘천을 찾은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문이 남겨진 역사 문화의 길이기도 하다.

높고 가파른 고개로 유명했던 석파령은 일명 사직령으로도 불렸다. 서울을 떠나 춘천으로 부임하던 한 관리는 마석, 가평의 큰 고개를 넘어 힘겹게 당도했는데, 또 다시 석파령을 넘어 신연강을 건너가야 한다는 말에 그만 ‘사직’을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지금은 임도(1990년)로 개설되었지만 옛길은 두 어 군데만 끊겼을 뿐 오롯이 숨어있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지금의 임도와는 달리 됫박고개와 진구비로 이어지는 옛길은 석파령 정상에서 임도와 만나 다시 골짜기를 타고 내달린다. 됫박고갯마루엔 소나무 서낭이, 정상에 수청나무(물푸레나무) 서낭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이곳 정상은 임도로 한참 낮아졌지만 삼악산성(청운봉)으로 가는 길과 계관산으로 가는 갈래길이기도 하다.

 

춘천 부사 ‘교구식’ 하던 고갯마루

삼악산은 춘천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춘천 부사의 교구식이 있었음에 ‘석파령’이란 지명이 유래된 곳. 물론 지역마다 신구 부사 이임식 이야기는 많지만, 지명으로 남은 곳은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조선시대 춘천 수령이 이곳에서 교구(交龜-새로 부임하는 수령과 떠나는 수령이 고을의 경계에서 업무 인수인계(직인 등)를 하는 것)를 행할 때 산길이 너무 좁은 탓에 자리 둘을 깔지 못하고 하나를 둘로 잘라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2번 우는 고개로도 불리는데, 부임하는 관리는 너무 멀고 험한 곳으로 오는 것이 서러워 울고, 갈 때는 살아보니 정이 들어 떠나기 아쉬워 울고 넘었다고 한다. 대관령의 원울이재와 같은 이야기다.

험한 고갯마루엔 ‘짐꾼면장’ 이야기도 달려 나온다. 양구 현감으로 부임하던 이가 석파령에 다다르자 한숨을 쉬었다. ‘이 짐을 갖고 어찌 저 고개를 넘을까?’ 하여 동네 사람에게 “이 짐을 양구까지 져다 주면 면장을 시켜 주겠다.”고 했단다. 이 말에 넘어 간 어떤 사람이 감투 쓸 욕심에 양구까지 짐을 져다 주었으나 헛물만 켜고 돌아왔다고.

아무튼 이 고개도 다른 고개와 마찬가지로 고개 너머 당림리와 덕두원 양쪽 마을에서 농한기에 기별하여 날 잡아 풀을 깎고 정상에서 만나 음식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덕두원은 석파령 길손과 신연강 나루 길손들로 주막거리가 번성했던 곳, 주막 건달들과 석파령 교구식이 재연되는 민속놀이 ‘덕두원 주막놀이’가 신명나게 펼쳐지던 곳이기도 하다.

 

청음, 상촌 등의 숨결 서린 곳

조선시대 한문학의 태두로 불리며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상촌 신흠은 광해군 때 선조의 ‘칠교유신’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파직돼 1617년 홍유도(중도) 아랫자락으로 유배를 온다. 이곳에서 5년 여간 있으며 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석파령 넘기를 두려워하며 춘천으로 온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며 ‘잘 있거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를 읊은 청음 김상헌(1570~1652)이 1635년 춘천을 유람하며 지은 ‘청평록’에는 안보역이며 석파령, 소양정, 청평사 일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가족을 데리고 석파령을 넘던 추억도 펼친다.

이외에 조선 후기 사상가이자 문장가로 이름 높던 농암 김창협, 이재난고를 쓴 이재 황윤석, 백호 윤휴 등 쟁쟁한 조선 선비들이 이 길을 넘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도 유배에서 풀려 두물머리로 귀향한 후 1820년과 1823년 춘천을 물길로 왔으나 현등협을 지나며 바라본 삼악산 석파령을 화두시로 남겼다.

 

옛 사람들 ‘엄살’이었을까? 넓은 옛길(?)…

석파령은 말이나 사람들의 사고가 많아 우두사 승 지희(1558년), 춘천 부사 엄황(1647년)이 길을 정비했다고 하는데, 대관령에는 개통문이 있고 석파령에는 도로개통비가 전한다. 험로로 소문났던 석파령 옛길이 지금 걸으면 오솔길이 아님에 놀라게 된다. 외침에 시달렸던 우리나라는 無道則安全(길이 없는 것이 안전)이 도로 정책이었다. 하여 중국 사신로이던 의주로 말고는 6대로, 9대로로 불리던 길도 모두 소로였다.

하긴 사재를 보태 대관령 길을 넓혔던 강릉부사 고형산은 백 년 후 임진왜란(혹은 병자호란) 때 주문진으로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관동대로로 진군하자 길을 넓힌 죄를 물어 부관참시까지 했던 나라였다.

춘천은 이수삼산(二水三山 -봉의산, 고산, 삼악산/ 소양강, 모진강)의 분지형으로 예부터 식자들은 꾸준히 방어영을 둘 것을 건의해 왔다.

승정원일기(고종 25년, 1888. 4. 19)에는 “춘천은 바로 동북쪽의 관문이니, 옛날 정묘호란(1627) 때는 단지 200명의 정병을 가지고 석파령(石坡嶺)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그 지형이 믿을만한 보루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점에서…”를 고해 유수가 되고 이궁을 두게 된다. 춘천 이궁경영에 관심 많았던 고종은 사상명의였던 이제마에게 은밀히 춘천이 과연 피란할만한 곳인지 알아보고 오라고 한다. 그러나 “산은 심히 좋으나 전국인민이 피란한다면 판국이 좁아서 될 수 없더이다.”는 보고에 불쾌히 여겨 퇴거하라 명하고 그 후로는 냉대하야 다시 부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옛 기록에 걸어서 넘기도 무서웠다는 이 길이 생각보다 넓은 것은 춘천 이궁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1910년대 강길이 열리고 1920년대 차도로 개통되었으나 석파령은 여전히 춘경통로였다. 1931년 신연강교가 놓이고 1967년 의암댐이 생기고, 1990년 임도가 뚫리면서 명맥이 끊겼으나 석파령 옛길은 세월의 두께만큼 사연이 쌓인, 우리들 마음 속 오래된 미래의 길이다.

석파령 옛길이 복원되면 되돌이코스나 연계코스가 많은 것도 장점, 일본 규수 올레가 엔고와 원전피해 등으로 감소된 관광객유치를 위한 길 자원화 사업인 것을 감안하면, 무언가 아쉽다.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고 연둣빛 새순으로 몽실몽실 뒤덮일 오롯한 숲속 길이, 숨어 있는 길들이 날 부른다.

 

걷기 메모 : 덕두원 또는 당림리 출발, 봄내길 3구간 ‘석파령 너미길’로 다녀 올 수 있다.

임도를 따라 이어지며, 수레너미를 지나 방동리 신숭겸묘역으로 닿는다.

(도보로 5시간 정도). 옛길은 안내 없이는 찾기 어렵다.

▲ 석파령 옛길(됫박고개)     © 신용자
▲ 석파령 옛길. 진구비.     © 신용자
▲ 석파령 옛길 2     © 신용자
▲ 옛길과 임도가 만나는 곳     © 신용자
▲ 봄이 오는 길.     © 신용자
▲ 사라졌다 나타나는 옛길     © 신용자
산나물 12/03/22 [11:45] 수정 삭제  
  덕두원에는 가보았지만 그런 깊은 역사적인 스토리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신용자 길 칼럼니스트처럼 한번 걷고 싶네요!!!!!!!!
곰감검굼 19/09/23 [12:23] 수정 삭제  
  안녕하세요? 길 찾기 또는 안내를 받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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