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운 박권의 생애와 사상 재조명

북방영토의식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도 마련 - 원주문화원장 박순조

김철우 | 기사입력 2017/06/08 [13:54]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운 박권의 생애와 사상 재조명

북방영토의식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도 마련 - 원주문화원장 박순조

김철우 | 입력 : 2017/06/08 [13:54]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운 원주 출신 귀암(歸庵) 박권(朴權 : 1658-1715)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재조명이란 주제로 한 학술세미나가 원주문화원에서 열렸다. 원주문화원 주최 원주시와 박씨 대종회 후원으로 열린 세미나에는 함종한 전 강원도지사, 박호빈 원주시의회 의장, 박우순 박씨 대종회 원주시지회장, 박영선 전 밀양 박씨 대종회장, 박병일 전 박씨 대종회 중앙회부회장, 박재천 전 고령박씨 대종회장, 학계와 문화계 인사 200여 명이 참석하여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학술세미나에서 연세대 오영교 교수는 박권의 생애와 정치활동, 강석화 경인교육대 교수 접반사 박권의 정계비와 18세기 조선의 북방영토의식, 윤덕진 연세대 교수의 박권의 문학사상과 귀암집의 귀환에 대해서 주제를 발표했다. 이어 심철기 연세대 교수, 김대중 강원일보 원주지사장, 신창곤 독서당 고전 교육원 교수 등이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토론에 참석하지 못한 이인걸 간도학회 회장은 접반사 박권의 백두산정계비와 18세기 조선의 북방영토의식이란 주제에 대한 이견이란 토론문을 보내와 토론에 대신했다.

학술세미나 내용을 주제별로 간추려 본다.

 

▲     © 김철우

 

 

오영교 교수 : 박권의 생애와 정치활동

 

 

 

박권은 멀게는 충북 제천 현감을 지낸 박의림(朴義林)을 선조로 두고 있다. 의림은 현감 재직 시 의림지를 증·보수 축조하여 그의 이름이 오늘의 제천시 의림지로 불리게 되었다. 직계로는 박유(朴維)가 목천현감을 역임하여 모천현감파(현재 : 판서공파)로 구별되고 있으며 다시 소종파로 나뉘면서 밀양 박씨 이정공파로 박열(朴說)을 파시조로 두고 있다.

 

6대조인 이정(夷靖) 박열(朴說 : 1464~1517)은 박의림의 증손으로 1489년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으로는 예조판서 2, 이조판서 3, 대사헌 4번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로 선정되어 임금이 청백전가(淸白傳家)라는 4자의 글을 써 직접 하사하였다.

 

그의 증손 박효남(朴孝男])은 병조좌랑을 하였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아버지 박시경(朴時璟)은 원주 목사로 재임하는 동안 청백리 목민관으로 칭송이 잦았다.

 

대대로 고위 관료를 많이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박권은 숙종 12년 과거에 급제한 후 30여 년간 재임하는 동안 경상감사, 동래부사, 황해·평안감사, 형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등 당대 초고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부정과 타협하지 않고 백성만 바라보는 강직한 목민관으로서 정평이 나 있다. 언제라도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살겠다는 의지가 내포된 귀암(歸庵)이라는 호가 말해주듯이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올바른 것에 대해서는 왕에 직언과 상소를 서슴지 않았다.

 

동래부사 재임 시에는 일본과의 심각한 갈등을 원활히 해결하는 등 외교적인 역량을 보여주어 왕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경상 감사 때는 임진란 때 소실된 박혁거세 시조대왕 위패가 봉안된 경주 숭덕전을 중수 복원했다. 성격이 너무 강직해 동료들까지도 경계하기도 했던 박권은 당시 살아있는 권력이었던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만행과 부정을 수차례에 걸쳐 상소하고 사대부가에서 과거시험제도의 모순을 이용하여 자식을 부정으로 합격시켜 권력의 대물림을 하고 있다며 왕에 상소와 직언으로 유배 또는 체직되기도 했다.

 

그러나 성품이 곧고 청빈하며 일 처리를 세밀하게 하는 등 행정력이 높이 평가되어 나라가 어려울 때면 다시 중용되었다.

 

이러한 성품과 외교력을 인정한 숙종은 박권을 접반사로 임명, 청나라 목극동과 국경을 협의토록 하며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게 되었다.

 

 

 

· 강석화 교수 : 접반사 박권(朴權)의 정계비와 18세기 조선의 북방 영토의식

 

 

 

접반사 박권이 청나라 차사원 목극등(穆克登)과 함께 백두산 정상 부근에 정계비를 세운 것은 숙종 38년인 1712515일이다. 백두산 정계비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새겨져 있다.

 

조선과 청나라가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토문강)을 잇는 국경을 정하고 정계비를 세운 것은 건국 이후 외국과 국경에 관해 맺은 최초의 협정이다. 우리 역사상 고구려 백제 신라 3국과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 사이에서도 명확한 국경은 없었으며 나라 마다의 세력범위와 지방의 거점이 되는 성을 중심으로 국경은 이루어져 왔다. 이는 고려와 금(), 조선과 명·청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바다를 국경으로 하는 일본과 다르게 강이나 산 등 뚜렷한 자연경계가 없는 한반도 북부나 만주지역에서 명확한 국경을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건국 후 북진 정책으로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 등을 북방경계로 확보하였으나 이 또한 세력을 확장한 것일 뿐 국경선을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 백두산 정계는 조선과 청나라 간 강과 산의 명칭을 분명히 한 규정으로 그 의미가 크다. 이같이 국경을 정하게 된 배경은 청나라 강희제는 자신들의 본거지인 만주의 이권보호 등을 위해 심양 동쪽 지역에 광범위한 봉금지대(封禁地帶)를 정하고 특별관리를 해왔으나 양국 간에 월경문제로 잦은 충돌이 발생하자 이를 방지하는 조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업적을 이루었으나 박권과 목극동은 지리정보가 어두운 데다 선입견 의견 차이 등으로 각국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정계비 동쪽경계라 명시된 토문강이 구체적으로 어느 강을 지칭하는 것인지 불명확하며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지류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거론되기 시작한 두만강과 토문강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은 간도 지역 영유권 분쟁의 근거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백두산 정계 전후의 정황과 사료의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정계비의 토문강은 두만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편집자 주 : 정계비를 세운 박권에 대해 수원 확인작업에 참여하지 않아 회담의 주도권을 빼앗겨 국토를 잃었다는 등 비판여론이 팽배했으나 정계비 협상 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 다시 병조판서에 복귀하는 등 절대적인 왕의 신임으로 승승장구 한 것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이로 볼 때 박권은 왕의 내략을 충실히 이행하는 등 당시 상황에서는 성공적인 협상을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묘비에 득지 5백 리라 새겨진 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 김철우

 

 

윤덕진 연세대 교수 : 박권의 문학사상과 귀암집의 귀환

 

 

 

박권이 남긴 문집은 북정일기, 서정별곡, 귀암집 등으로 모두가 당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문학적 가치와 함께 사료로도 가치가 높다.

 

북정일기는 1711년 사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1712319일 선친의 묘지 이장으로 원주에 머물러 있었으나 접반사로 임명되어 324일 서울에서 출발해 713일 귀임할 때까지의 모든 일을 일기형태로 쓴 기행문이다. 이 일기는 근 100일간 머문 지역과 주변 상황, 목극동과의 협상 과정 등을 자세히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서정별곡은 사대부 가문에서 남긴 몇 편 되지 않은 가사문학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694년 서정관의 임무를 띄고 청나라 연경까지 가면서 주위풍경을 남겨 당시의 주변을 연구하는데도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그러나 박권에 대해 중점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귀암집은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다. 후손인 박영구씨(작고)가 보관하고 있었으나 지방 언론사에서 기자가 빌려 간 후 되돌려 받지를 못해 찾을 수가 없다. 각 문집에 실려 있는 글을 모아 재구성 귀암집을 복원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하겠다.

 

 

 

<사진설명 : 편집자 주>

1908년 일본 경찰이 백두산정계비를 조사하고 있다.

사진제공 : 육락현(간도 문화체험마을 촌장)

 

▲     © 김철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94월 만주철도 부설권(봉안선 철도)을 얻고자 청나라의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주장을 인정,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 지역을 청에 넘겨주었다.

이 지역은 중국도 인정한 조선 측 봉금지대로 서간도와 북간도를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에 편입시켰으며 1902년에는 이범윤(李範允)을 간도 관리사로 임명, 실질적인 지배를 해왔다. 정계비는 1931728일 이후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차후 국경분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없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은 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유권임을 알고도 청나라의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이 1909년 일본이 제작한 제9도 백두산정계비 부근 수계답사도(이종학 소장)에서 밝혀지고 있다. 조선총독부도서라는 직인이 찍혀있는 이 지도에는 중국에서 지명 자체가 없어진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로 표기되어 있다.

위의 내용은 대부분 이원명 서울여대 교수의 논문을 인용한 것으로 이 교수는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라 주장하고 있다. 또한, 박권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며 올바른 평가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본 기사 보기: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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