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재(不離齋) 1 - 수필가 송정자

박현식 | 기사입력 2019/09/30 [21:48]

불이재(不離齋) 1 - 수필가 송정자

박현식 | 입력 : 2019/09/30 [21:48]

 

▲ 수필가 송정자     ©강원경제신문

시골 한쪽 길가에 함초롬히 피어있는 조그만 무더기의 들꽃처럼 한 뼘 정도 크기의 아주 작은 나무판에 불이재미술관이라 쓰여 있는 하얀 색칠을 한 팻말을 보았다.

 

한적한 길에 방향을 가리키는 까만 화살표는 차가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양쪽으로 7월의 무성한 풀이 앞 다투어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원주시 귀래면으로 귀촌 한지 몇 년째라 이 길을 지나 다녔지만 이런 곳에 미술관이 있을까 의아해 했다. 조그만 삼거리에 삼태미 마을이 있고 운계리 다둔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어느새 길섶에 까지 길을 장악한 풀들이 차 바닥을 훌치는 소리가 들렸다. 꾸불꾸불 제법 오르막길을 올랐더니 백운산자락에 비스듬히 자리 잡고 있는, 마치 산사와도 같은 고풍스러운 지붕이 나타났다. 

 

풀밭에다 차를 대고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건 청자 빛이 물씬 풍기는 도판에 불이재라는 한문 전서체로 새겨진 내 키를 훌쩍 넘는 크기의 입구 간판이었다. 한 눈에도 간판부터 예사로운 분위기가 아니다. 우리는 일주문을 지나가듯 조심스런 발걸음을 옮겼다.

 

정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상들과 대들보기둥을 높이 치켜세운 황토 흙 건물의 입구가 보이고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다.

 

오른 쪽 둔덕에는 개망초 군락이 마치 계란을 쏟아 부은 듯 노랗고 하얀 물결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쩍쩍 벌어진 어깨를 힘자랑 하듯 복숭아나무들이 가지마다 노란 봉지를 달고 마지막 단맛을 받으려 강렬한 햇빛을 향해 서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 모든 풍경들이 흙과 나무로 정성들여 지어진, 나지막한 지붕을 한 본채의 토속적인 건축미에 더욱 멋을 입혔다. 마치 단청이 없이 지어진 양반가의 고택처럼 여유롭고 아늑하고 깔끔하면서 품위를 더했다. 아마 이 미술관을 지을 때 오랜 시간과 함께 공간의 활용성과, 바라보는 아름다운 눈 맛 등 디테일에도 많은 공을 들이지 않았나 싶다.

 

황토 흙담에 나무를 잘라 둥근면을 흙속에 심어 전체적으로 따듯한 느낌과 정감을 더했다.

 

바닥에서부터 통 유리창 아래로 허리만큼의 높이에 구불구불한 형태로 돌과 흙을 덧붙이고, 낮은 돌담위로 기와를 얹어 진한 색상을 연출해 마치 한 마리의 뱀이 꿈틀거리는 생동감을 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기척이 없었다.

길고도 높은 대들보가 세워진 공간의 현관문에는 큰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바닥에는 흙이 잔뜩 묻은 긴 장화가 가지런히 놓아져 있다.

 

양옆으로는 이 건물을 지키는 수호신마냥 흙으로 빚은 듯 한 남녀의 얼굴조각상이 나란히 놓아져있다. 가슴팍까지 오는 대형 얼굴 조각상의 표정을 보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 다소 거칠은 질감이지만 아주 세밀하고도 정교하게 손으로 조각을 한 것 같다. 그 위에다 또 흙을 덧 붙여 다시 새겨 나간 듯 한 무한반복의 연속 작업만이 표현 해 낼 수 있는 여인의 얼굴이다. 부처를 닮아 있는 것도 같고 자애로운 수녀의 얼굴도 같아 보인다.

 

내가 어릴 때 심부름으로 방에 들여다 준 고구마를 드시고는 잠자듯 돌아가신 할머니의 무표정한 얼굴 같고, 마지막까지 고통과 통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 같기도 하다. 눈물이 언뜻 고여 왔다. 어떻게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한 얼굴에서 이리도 많은 표정이 살아날까.

 

조각상을 보는 내내 차갑지 않으며 따스하고 부드러워 질박한 그 품에 안기고픈 정감이 전해졌다. 사람의 마음을 아늑하게 만드는 작품을 뒤로 하고 이미 들어선 마당이니 정원 쪽으로 향했다. 아주 우람하고 잘생긴 큰 소나무아래 하얀 조각상의 수녀님이 있고, 한 몸이 되어 서로 위아래로 마주보며 촉촉한 눈빛을 주고받는 연인상이 전시되어 있다. 흙으로 빚은 작품과 하얀색의 입자는 잘 알 수는 없었으나 차가운 석고의 느낌은 아니었다.

 

정원의 위쪽에는 마치 암벽에 새긴 그림을 풀밭에 뉘여 놓은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두 여인이 있다. 무엇인가 자유를 갈망하며 또 무엇인가를 꿈꾸는 듯 몽환적인 표정으로 풀밭에 누워 자연의 품속에 안긴 것처럼, 연인의 품안인 듯 평온하게 보였다.

 

그 외에도 여기 저기 자유롭게 흩어져 있는 자연의 풀밭에 무심한 듯 툭 던져 놓은 듯한 저 작품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는 회귀를 나타내는 것일까. 작품의 제목이 없고 그 흔한 도록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작가의 이력 한 줄 또한 새겨져 있지 않다. 문이 잠긴 저 내부의 공간에는 또 어떤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을지.

 

어쩌면 이리도 공력이 대단해 보이는 자식 같은 대형 작품들을 이리 저리 풀밭에 뉘여 놓고 작가 분은 어디를 가신 것일까. 

 

잠시 정자의 그늘로 올라가 더위를 식혔다. 아마도 연못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계단 아래의 움푹 패인 마당은 무성한 풀들로 가득 뒤 덮혀 있다. 한때는 미술관에서 성황리에 개관식을 했을 테고 연못엔 연꽃들이 피어나고 멋진 소나무를 심었겠지. 마당에는 예쁜 꽃들로 잔치를 했으려나. 작가의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을 것 같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을 테지. 지금은 왠지 그 어떠한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운영을 잠시 미루어 놓은 상태로 느껴진다.

 

다시 재도약을 꿈꾸는 용틀임의 시기인 것도 같고, 화려한 이력 뒤에 잠시 숨을 고르는 휴식 기간 일 것도 같다. 나는 순간적으로 펜과 메모지를 꺼내 이렇게 썼다.

 

“선생님 조그만 입간판의 불이재라는 글씨에 이끌려 주인도 안 계신 미술관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습니다. 꼭 한번 작가님이 해설해주시는 작품 관람을 하고 싶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쪽지를 잘 접어 묵직한 자물쇠 고리에 빠지지 않게 단단히 끼워 놓았다.

 

가까운 날에 다시 올 것 같은 기대감으로 뒤돌아보며 멀리 자리 잡은 백운산 자락을 내려왔다.

 

차가 움직일 때마다 길바닥으로 쓰러지며 꼬꾸라지는 풀들의 거친 신음소리에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흙으로 빚은 미소를 담아 와서 일까.

 

  

수필가 송정자

 경남 밀양 출생

한국수필신인상으로 등단

미리내 수필 문학회 총무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동대문 문인협회 감사

공저 <<내게 준 선물>>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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