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 지음, 2016) / 차용국

박현식 | 기사입력 2020/03/03 [00:07]

[서평]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 지음, 2016) / 차용국

박현식 | 입력 : 2020/03/03 [00:07]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 지음, 2016) / 차용국

  

우리는 시를 느끼고 사랑하기보다 시를 분석하고 평가하기를 먼저 배워왔기에, 시를 정서적 기능보다 이성적 지성의 산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자극적인 시가 독창성으로 미화되어 평가 우위를 독차지하면서 시가 전문가들의 전유물처럼 되었고, 일반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대중가요 가사 수 편을 음악에 맞추어 술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아도, 시 한 편을 제대로 읊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시는 모국어로 지은 언어 예술입니다. 이는 우리가 엄마에게서 배운 말로 시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모국어로 지은 시, 엄마에게서 배운 말은 쉽고 친밀한 말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엄마가 자식에게 어려운 말을 가르쳤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등바등 바쁘다는 변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면서 시를 잊고 살아갑니다. 시를 읽지 않아도 출세를 하고 재력을 쌓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흔한 말로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정말 그런가? 저자는 충고합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나오는 키팅 교수의 말을 빌려, '의술, 법률, 사업, 기술 등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어쩌면 시는 SNS 시대에 딱 맞는 문학이 아닐까? SNS 시대에는 길고 장황한 글을 싫어합니다. 그것을 끝까지 읽는 수고에 익숙하지 않은 태생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반면에 시는 짧고 함축적입니다. SNS 시대의 언어와 제대로 어울리는 궁합입니다. 또한, 시어가 생활어로 두루 쓰이면 말도 멋있고 듣기에도 좋고 운치도 있습니다. 그러니 시는 만인이 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전문가와 상당한 수준의 지성을 가진 사람들만의 리그에 갇혀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저자가 이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제목 밑에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라는 부제를 단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시는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기쁨도 심지어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것도 공감의 산물입니다. 그런 공감의 능력이 사라진 사회는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는 이미 죽은 사회입니다. 시는 고통을 모르는 이에게 고통을 느끼게 해 주고, 슬픔을 모르는 이에게 슬픔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사랑입니다(92).

 

공감도 능력입니다. 공감은 공명에서 나옵니다. 공명이란 과학적으로 말하면 어떤 물체의 진동에너지가 다른 물체에 흡수되어 그 물체가 진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원래 진동에너지의 진동수와 진동에너지를 받는 물체의 고유 진동수가 가까우면 더 큰 공명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92). 이런 과학적 설명이 사실임은 틀림없지만 몇 번을 읽어도 공감을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영 껄끄럽기만 합니다. 여전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공감을 쉽게 말할 수는 없을까? 있습니다. 공감은 남과 더불어 우는 것입니다. 남이 울면 따라 우는 것이 공명입니다. 남의 고통이 갖는 진동수에 내가 가까이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이 공명인 것입니다. 마치 현악기처럼 그 소리가 울려 퍼져 음악을 만들듯 우리 사회에도 아름다운 공명이 울려 퍼질 수 있다면, 그때 분명 우리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 것입니다. 슬퍼할 줄 알면 희망이 있습니다(93). 시는 남과 더불어 우는 공감이기에 시를 사랑하고 누리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런 사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시 짓는 일을 전업으로 해서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시라는 것이 매일 쏟아져 나오는 것도 아니거니와 현실의 세상과 유리되어서 지은 시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시인이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을 그리는 시를 지을 수 있는 것도 현실에 발 부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릉도원에 사는 시인은 결코 그곳을 그리는 시를 지을 이유가 없습니다. 시인은 시인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시인은 생활인이기도 합니다. 생활은 그들의 바탕이 되지만 구속이 되기도 합니다(152). 시인과 생활인 두 개의 삶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노래하는 풍경이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조화롭게 다듬어진 것이 시입니다.

 

SNS를 통하여 수많은 시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가끔은 SNS 상에 올라온 시에 관해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논쟁이 상호이해를 찾아가기보다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상호간에 상처만 남기기도 합니다. 자기의 해석만이 정답이라고 과신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시를 읽고 해석하고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시를 비롯한 문학 작품은 하나의 해석과 감상만을 요구하거나 용인하는 절대 진리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논쟁적인 것입니다. 이 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시가 좋은 시인지 등등의 문제는 대단히 논쟁적이란 뜻입니다. 적어도 문학에서 자명한 것은 없습니다(285). 나의 생각과 감성이 중요하듯이 다른 사람의 그것들도 중요하다는 것이야말로 평범한 진리이지만, 그것을 수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문학, 특히 시는 다양합니다. 다양하다는 것은 수많은 사이와 차이가 상존한다는 함의입니다. 사이와 차이는 다름과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학에는 많은 대화와 논쟁거리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소통되는 듯 서로 공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메울 수 없는 틈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284). 문학, 특히 시에서 논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 일 것입니다. 논쟁과 대화의 목적은 차이의 제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더 잘 들여다보고, 그로부터 우리 자신과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요컨대 사이와 차이는 우리를 오히려 관용의 세계로 이끌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이와 차이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어둡던 눈이 떠지는 개안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285). 결국, 논쟁은 남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관을 확장해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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