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난중일기(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옮김, 2018) / 차용국

이정현 | 기사입력 2020/04/27 [20:42]

[서평] 난중일기(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옮김, 2018) / 차용국

이정현 | 입력 : 2020/04/27 [20:42]

 

▲ 난중일기

 

난중일기(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옮김, 2018)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428일은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입니다. 이순신은 1545428일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충사가 있는 아산은 그의 외가입니다. 파주 사람 율곡 이이가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인 강릉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듯이, 서울 출생 이순신은 어머니의 고향인 아산에서 자랐습니다. 이러고 보면 조선 시대 외가 성장은 매우 널리 퍼져있는 관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순신의 성장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습니다. 이는 이순신 자신이나 그의 부모가 그의 성장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 없기도 하지만, 이순신이 여느 사람보다 특별해 보이는 그 무엇이 없었던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1576년 무과 시험에 합격해서도 주로 변방인 함경도 등지에서 하급 군인으로 관직 생활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수광이지봉유설에서 이순신은 무인 속에 있어서 이름과 칭찬이 드러나지 않다가, 신묘년에 서애 유성룡이 정승이 되어 그를 쓸 만한 인재라고 하여 정읍 현감에서 차례를 뛰어넘어 전라 좌수사를 재수하니, 드디어 중흥의 제일 명장이 되었다라고 적은 바와 같이, 이순신은 답답할 정도로 평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순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불세출의 영웅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큰칼을 들고 위엄 있게 서있는 동상처럼 타고난 영웅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물론 이순신이 '구국의 영웅'이란 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지만, 인간미가 사라지고 신격화된 우상의 모습으로 왜곡되어지는 것을 이순신 자신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의 부적절한 모습은 1960년대 군사 정권이 영웅사관을 통하여 그들의 권력을 더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엮은이). 쿠데타로 정권을 움켜쥔 군사 정권은 이순신이 목숨을 바쳐 지킨 구국의 이미지와 자신들의 쿠데타의 정당성을 일치시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끝나던 해인 1598년까지 7년간 진중에서 쓴 일기입니다. 물론 이순신이 7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 것은 아닙니다. 15921월 초1일에 시작한 일기는 간헐적으로 빠져 있기도 하고, 상당히 긴 기간 쓰지 않기도 했습니다(1592. 5. 5 ~ 28 / 6. 11 ~ 7. 31 / 8. 24 ~ 9. 2. 및 이후에도 다수 빠져 있음). 일기를 쓰지 못할만한 상황이 많았었다는 함의이기도 합니다. 특히 한창 배를 타고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든가. 1597년 체포되어 서울에 올라가서 심문을 받던 동안에는 꽤 오랫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습니다(엮은이). 전쟁 중에 일기를 매일 계속 쓰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난중일기친필 초고는 아산 종가가 보존해 오던 것을 현재 국보 제78호로 지정하여 아산 현충사로 옮겨 와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조 19(1795)에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편집, 간행한이충무공전서에 실었습니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이때 편찬자에 의해 편의상 붙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친필 초고와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일기를 비교해 보면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끼는 과정에서 글의 내용을 임의로 요약하거나 실수, 의도적 누락과 추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필 초고 가운데도 보관의 불찰이었는지 찢어지거나 글자가 흐려지거나 한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엮은이). 그래도난중일기의 사료적 가치는 풍부합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정치경제사회군사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또한 당시 조선 수군의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는 원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난중일기는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기록이 곧 역사입니다.

 

난중일기를 통해 본 이순신은 장군으로서의 호방함보다 원칙을 지키는 깐깐한 인물을 연상케 합니다. 그는 매사를 꼼꼼하게 점검하고, 원칙에 따라 한 치의 융통성도 없이 처분을 내리는 인물이었습니다. ‘1592116일 방답진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고치지 않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우후, 가수들이 또한 감독을 소홀히 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25). 1592225일 사도진의 여러 가지 전쟁 방비를 살펴보았더니 결함이 많았다. 군관과 책임을 맡은 서리들을 처벌하였다(33). 1592116일 성 밑에 사는 병졸 박몽세는 석수장이인데 선생원에 쓸 돌 뜨는 데로 가서는 동네 개를 잡아먹는 등 민폐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렸다(25)’라고 썼습니다. 그러면서도 ‘1596123일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하게 불었다(271)’라고 적었습니다. 원칙에 따라 처분하되 궁핍한 부하들에게 옷을 내어주는 가슴 따뜻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이순신은 여느 사람보다 건강하거나 강한 체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잠을 잘 못 자는 것은 물론이고, 배가 아프거나 구토, 설사,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는 일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엮은이). ‘1592년 초2일 밥을 먹은 뒤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차츰 더 아팠다. 하루 내내 아픔이 계속되었고 또 밤새도록 신음하였다(39). 1593812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누워서 하루 내내 끙끙 앓았다. 식은땀이 때도 없이 흘러서 옷을 적셔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126)'라고 쓰는 등, 여러 곳에서 자신의 건강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합니다.

 

이순신은 여느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특히 원균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은 적나라합니다. ‘1593223일 원 수사(원균)는 너무도 음흉하여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87). 15933월 초1일 이영남과 이여념이 와서 원균의 비리를 전하였다. 깊이 탄식할 따름이다(89). 1593514일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98). 원균이 포구에서 교대하려고 도착하였기에 수사 배설이 교서에 절하라고 하였는데 불평하는 기색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여러 번 타이른 뒤에야 억지로 행하였다고 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219)’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순신은 걱정이 많고, 눈물도 많고, 효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각별했습니다. ‘15921월 초1일 새벽에 아우 우신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어머니 곁을 떠나서 두 해째 남쪽에서 설을 쇠자니 슬픔이 북받쳐 온다(23). 15935월 초4일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94). 15974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338). 15975월 초4일 어머니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닭이 울 무렵에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342)’고 고백합니다.

 

또한 ‘1592년 초2일 아침부터 아들 염의 병이 어떠한지도 모른 데다가 적에 대한 소탕도 늦어져서 마음이 무거워 밖으로 나가 마음을 풀고자 하였다.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염이 아픈 곳에 종기가 생겨 침으로 찢으니 나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며칠만 늦었어도 치료하기 어려울 뻔했다고 한다. 놀랍기 그지없다. 이제는 조금 살아날 길이 있다고 하니 다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124)’며 걱정을 덜기도 합니다. 1592824~92일 부산에서 있었던 제4차 해전에서 우부장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하자 녹도 만호 정운은 변란이 생긴 뒤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솟구쳐서 적과 함께 같이 죽기를 맹세하고 세 번 싸움에 매번 앞장섰다. 부산 싸움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이 쏜 총알에 이마를 뚫려 전사하였다. 지극히 슬프고 가슴 아팠다(76)’고 오열하기도 합니다.

 

이순신은 체력과 지략을 타고난 것도 아니고, 처세의 융통성도 딱히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적과의 싸움에서 전승을 이루어내고 구국의 영웅이 된 것은, 원칙을 지키는 책임감과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을 함에 있어, 자기 몸을 보살피지 않고, 조금도 물러섬 없이, 그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면서도 그가 관장한 고을의 공문이나 백성들의 소장을 처리했습니다. 시간을 미루지도,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도 않았던 것입니다(엮은이). 1592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그 직전인 2월에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엮은이). 그는 쉼 없이 부대와 무기의 전비태세를 검열하고, 총포와 같은 무기 개발에 전력했습니다. 거북선도 이러한 준비가 있었기에 건조할 수 있었습니다.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 위에 쇠뚜껑을 덮어 개량한 철갑 돌격선입니다.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가 지자포와 현자포를 마구 쏘아대는 거북선은 공포의 첨단 무기였습니다.

 

난중일기를 통해서 신격화된 우상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따뜻한 사랑으로 충만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인간 이순신은 진정한 영웅입니다.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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