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의 문을 열다(송은애 지음, 2016) / 차용국

박현식 | 기사입력 2020/06/28 [22:31]

고택의 문을 열다(송은애 지음, 2016) / 차용국

박현식 | 입력 : 2020/06/28 [22:31]

 

▲ 고택의 문을 열다(송은애 지음, 2016) /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고택의 문을 열다(송은애 지음, 2016)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석림사 가는 길에 서계 고택 찾아가니

사랑채 앞뜰에서 까치가 노닐다가

푸드덕 날갯짓하며 재잘재잘 반기네

 

구름도 쉬어가는 드높은 은행나무

거목의 꼭대기에 늘 푸른 집을 짓고

서계의 시대정신을 전하려고 하는가

  

하실 말 하도 많아 쉴 틈이 없는데도

무심한 사람들은 걸음만 바쁘구나

그 소리 메아리 되어 돌을 스쳐 흐르는데

  

(졸시, '서계 고택 까치' 전문)

 

의정부시 장암역에서 내리면 계곡 옆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서계 고택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실학자 서계 박세당(1629~1703)이 은퇴한 후, 이곳에 궤산정이란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그가 심은 수령 400여년 된 은행나무 꼭대기엔 까치가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나는 수락산행 중에 이 고택과 은행나무와 까치 소리가 어우러진 풍경에 홀려 위 시조를 지었습니다. 내게는 소중한 수확이었습니다. 수년 간 걷기 여행을 해오고 있기에 고택을 만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시로 발전하기는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 걷기 여행의 테마가 고택에 있지 않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

 

몇 해 전 대전에 사는 송미순 시인의 소개로 '문예마을'이란 문단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모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이 책의 저자 다헌 송은애 시인을 만났습니다. 송 시인은 이미 10권의 시집을 출간한 원로시인이었습니다. 그녀로부터 이 책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시사저널 ''청풍''에 '고택을 찾아서'란 제목으로 연재한 내용입니다. 자세히 말하면, 2013년 7월 '남간정사'를 시작으로 2016년 10월 '세종시 유계화 가옥까지 40편의 고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이 연재물을 합본한 고택 탐방기입니다.

 

나는 책을 사거나 받으면 바로 읽고 많든 적든 감상문이나 서평을 쓰곤 합니다. 저자가 심혈을 바쳐 쓴 책을 그냥 대충 읽고 마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정리한 생각이나 책의 요약 내용 자체가 나중에 귀한 자료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단숨에 읽고도 오랫동안 서평을 쓰지 못했습니다. 현장에서 체험하고 사유하며 글을 쓰는 습관에 익숙하다 보니, 이 책에서 소개한 많은 고택을 직접 가서 보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낯선 일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나의 걷기는 주로 한강을 중심으로 강물처럼 걸어 내려오면서 강화도로 빠져나가는 노선에 있었기에, 내가 보고 관찰한 고택의 대부분도 한강 주변의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제약이 다 풀린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거쳐 온 세월의 풍경 속에서 조금은 더 농익은 그림으로 그려진 여러 고택들이 추가로 들어섰기에 용기를 내어 책을 다시 펼치고 송은애 시인과 함께 고택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습니다. 

 

'남간정사'(대전시 동구 가양동)'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의 고택입니다. 송시열은 옥천에서 출생한 조선 시대 기호학파의 대가이자 인조부터 숙종 간 노론의 대표이기도 했습니다. 이 고택은 그를 따르는 많은 제자를 교육하고 학문을 논했던 곳입니다. 남간정사의 백미는 정사 앞에 있는 넓은 연못과 정원입니다. 대청 밑을 통하여 연못으로 흘러드는 매우 독특한 조경수법입니다(12쪽). 두 그루의 느티나무 고목을 바라보며 송은애 시인의 말을 들어봅니다. ''고건축 답사를 오는 사람들은 그 주변을 잘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수 백 년 묵은 고목을 보며 그 내력 쫓다보면 전통문화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살아있는 나무들도 그러하지만, 죽어서 집이 된 나무 또한 수백 년을 훌쩍 넘긴 고택으로 남아 고색의 멋스러움과 굳건함을 온몸으로 전하고 있어 예스러움이 더한다(14쪽)''고. 그렇습니다. 남간정사는 자연에 거슬리지 않고 관조하며 유연하게 살아가는 우리 전통문화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있는 자연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주위 환경에 어울리는 집을 단정하게 올려놓습니다. 그래서 집은 그대로 자연의 일부입니다. 사치스럽지도 궁색하지도 않은 단아한 고택은, 그대로 지조와 품격을 지닌 선비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선비는 학문을 연마하고 세상에 나가 각기 맡은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을 소임이라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부모와 여러 지인들의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그 소임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소임은 열과 성을 다 바쳐 후회 없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임을 마치면 모든 영예를 미련 없이 내려놓고,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거나 자연을 벗 삼아 살았습니다. 남양주시 송촌리 마을 끝자락 운길산 바로 아래에 가면 아담한 고택을 볼 수 있습니다. 한음 이덕형(1561 ~ 1613)의 별서입니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 고목과 두물머리를 지켜보는 이 고택은 한음이 관직에서 물러나 부친을 모시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마련한 집입니다. 운길산과 북한강과 남한강이 펼치는 빼어난 산수와 멋스럽게 어우러진 작은 고택입니다. 퇴임 후 자연으로 돌아가 소박한 삶을 살고자 했던 선비의 정신과 최적의 조합을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과천시 청계산 옥녀봉 아래에는 추사박물관이 있고, 그 옆에 과지초당이 있습니다. 이 초당은 추사 김정희(1786~1856년)의 아버지 김노경이 한성판윤으로 있을 때 마련한 별서였습니다. 추사가 39세(1824년) 때였습니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린 추사가 4년(1852-1856년 / 67세-71세) 동안 독서와 글쓰기를 하며, 난을 치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살다가 71세의 일기로 서거한 고택입니다. 하지만 원래 추사의 고택은 충남 예산시 신암면 용궁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자 영조의 사위인 월성 김한신이 영조로부터 하사받았다고 합니다. 김한신은 서울 장동에 있는 원래의 집이 너무 크다며 영조에게 상소하여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 고택은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 연구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채 댓돌에 석년이라 각자된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였다고 합니다. 그 시절 해시계로 추정되며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31쪽)고 합니다. 추사기념관에 들러보는 것도 실속 있는 덤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세상이 변하고 만물도 변하듯이, 집짓기의 기술과 재료뿐만 아니라 집의 구조도 변화하고 발전합니다. 충남 역사박물관을 지나 영명중고등학교 뒤쪽 언덕에서 공주 시내를 한눈에 바라보고 있는 근대 고택이 있습니다. 1921년에 미국 선교사 샤프( Robert Arthur Sharp) 부부가 공주에 최초로 붉은 벽돌양식으로 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집입니다(84쪽). 내부는 계단실과 각층공간을 스킵플로어(Skip floor)란 독특한 공법으로 지었습니다. 스킵플로어공법이란 1층에서 반 계단을 올라가면 1.5층 거실과 주방이 있고, 거실에서 내려가면 지하로 반 계단 올라가면 2층, 2층에서 반 계단 올라가면 2.5층이 있는 구성형태를 말합니다(85쪽). 샤프 부부는 이곳에 살면서 영명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졸업생 윤창석은 3ㆍ1운동의 한 계기가 된 동경 유학생 대표로서 2ㆍ8독립선언을 주도했고, 3ㆍ1운동 때는 김수철, 유준석(유관순의 오빠) 등이 공주 독립만세 운동 주동자로 참여했습니다. 유관순을 발탁해 영명학교에서 잠시 교육시키다가 다시 이화학당으로 보냈습니다(86쪽). 송은애 시인은 말합니다. '오래전 사람들의 편견도 사라지게 할 정도의 아름다운이 느껴지는 이 사택은 푸른 눈의 선교사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공주 시내를 내려다보며 선교사의 꿈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고...(86쪽). 그렇습니다. 고택에는 스토리가 있고 역사가 있습니다. 고택이 소중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속에 담겨있는 의미와 가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택은 양반이나 거상의 전유물만은 아니었습니다. 궁에서 소임을 마친 내시들도 궁을 나와 집을 짓고, 결혼도 하고, 양자를 들여 가계를 이으면서 살았습니다. 경북 청도 임당리 김씨 고택은 국내 유일한 내시고택입니다. 정3품 통정대부의 내관 벼슬을 지낸 김일준(1863~1954)의 집입니다. 이 집은 내시고택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시고택의 공간 구성은 일반적인 사대부가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특성을 보입니다. 특히 사랑채의 위치입니다. 사랑채는 보통 안채와 떨어져 있고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곳인데, 이 고택의 사랑채는 대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부인이 거주하는 안채의 출입을 감시라도 하듯, 작은 사랑채 왼쪽 문(중문)을 통해야만 안채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110쪽). 엄격하게 내부공간인 안채의 노출을 꺼리고 출입을 통제해 여성의 동선을 제한하려는 주인의 의도가 건축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하겠습니다(109쪽). 이 고택에서 당시 내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가첩이 발견되었습니다. 가첩은 한 집안의 혈통을 적은 족보입니다. 이 가첩에는 궁을 나온 내시가 결혼도 하고, 남자 아이 한 명을 양자로 입적해 가계를 잇고, 부를 축적하며 살았음(110쪽)을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택은 당시를 살아가는 현장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해석하고 조명해야 할 삶의 기록물이기도 합니다.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세종시 '유계화 가옥(부강면 용포동촌길)'은 조선 고종 3년(1866년)에 지은 전통한옥입니다. '유계화'라는 분은 이 집의 여 주인의 이름 입니다(247쪽). 이 가옥의 안마당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당 시대에는 대개 집안에는 우물을 파지 않았습니다. 수맥이 집터 아래를 통과하면 좋지 않다는 관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이 직접 집안일을 하지 않고 하인들이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고택의 안마당에 우물이 있다는 것은 당시 집주인이 관념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했다(249쪽)는 함의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 19에 발이 묶여 전전긍긍하며 답답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재난의 원인을 인간의 과욕에서 기인한 자연 파괴에서 찾기도 합니다. 심지어 혹자는 노골적으로 현시대를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류세란 현재의 시기를 지질학적인 시기에 빗대어 부르는 신조어입니다. 인류로 인해 지구가 파괴되는 시대라는 섬뜩한 말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하나로 동화되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고택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택의 문을 열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코로나 19에 지친 심신의 쉼터가 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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