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창작 강의(이지엽 지음, 2011) / 차용국

차용국 | 기사입력 2020/09/03 [06:11]

현대시 창작 강의(이지엽 지음, 2011) / 차용국

차용국 | 입력 : 2020/09/03 [06:11]

▲ 현대시 창작 강의(이지엽 지음, 2011) / 차용국  © 강원경제신문


현대시 창작 강의
(이지엽 지음, 2011)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인간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변화의 기록입니다. 세상 만물이 변하고 또 변하는데 어찌 시만 제자리에서 홀로 꽃을 피울 수 있으랴. 시인은 변화의 선봉을 달리는 사람일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심지어 시인 중에는 다양성과 변화라는 말을 곡해하여, 자신의 고정된 틀과 사고를 마치 남과 차별화된 자신만의 독창적인 다양성과 변화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유감스럽고 위험합니다. 차라리 백지 상태의 경우는 새로 색깔을 칠할 수 있지만(11), 잘못 든 길은 쉽게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8).

 

혹자는 다른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 것은 창작에 오히려 혼선을 준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는 서로 다른 다양한 시각을 가진 시인들의 미적 표현물이므로 시적 상상력을 계발시키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8). 중요한 것은 어떠한 시를 읽느냐일 것입니다. 저자는 대학교 1학년 학생 수업에서 무조건 30여 권의 정선된 시집을 읽혔다고 합니다. 이 시집들을 정독하면서 좋은 시를 베끼고 가급적이면 암기하도록 했습니다. 이 방법은 상당히 괄목할만한 성과를 가져와 학생들이 2학년 1학기가 지나자 급속하게 달라지기 시작하여 20대의 반랄한 비유를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11)고 합니다.

 

세상이 내게로 걸어 들어오거나 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여기에서 시가 탄생합니다. 이처럼 서정시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추구합니다.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동일화를 이루는 것은 자아가 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세계가 자아 속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나누어집니다. 전자를 '투사', 후자를 '동화'라고 합니다(25). 내가 나무 속으로 들어가고, 내가 벽 속으로 들어가고, 내가 연필 속으로 들어가면 분명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사실입니다(26). 이와 같이 투사는 시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동화는 ''라는 친숙한 주체 중심의 세계입니다. 세계가 자아 속으로 들어와 어떤 실체가 되었을 때 거기에서 시가 태어납니다. 동화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시인들이 즐겨 쓰는 방법입니다. 자아가 세계와 분리되지 않고 동일화된다는 점은 그만큼 단단한 인식을 만들기에 용이하다(27)는 이유입니다.

 

결국 시, 특히 서정시는 자아와 타아의 동일화 지점에서 탄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를 '나와 그'의 동일화라고 부르곤 합니다. '''시인'이고 '''시적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나와 그가 동일화된다는 것은 시인과 시적대상의 동일화입니다. 시적대상은 무수히 많습니다. 또 다른 나일 수도 있고,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자연이나 사물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이 진달래꽃이나 철쭉꽃이 되어, 딸을 잃은 아빠나 엄마가 되어, 등대나 섬이 되어 시를 지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와 그의 동일화는 시인의 시적 영역의 확대입니다. 시인이 나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내가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만의 제한된 시적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작의 영토를 확대할 수 있다는 함의입니다. 소설가가 자신의 경험과 사유라는 제한된 범주에서만 소설을 쓴다면, 그의 소설 영역은 매우 협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시인이 자신의 경험과 사유만으로 시를 짓는다면, 그의 시 영역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도 언어 예술이라는 점에서 창작의 허구성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시는 소설처럼 허구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감성을 함축하여 짓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서정시는 순간적인 장르입니다. 산문은 축적의 원리를 따르지만 시는 압축의 원리를 따릅니다. 탑을 쌓아가듯이 쓰는 것이 산문이라면, 다 사용한 캔을 프레스로 압축한 것이 시입니다(31). 시간의 길이와 시행의 길이는 같이 가지 않습니다. 백 년이나 천 년을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고 아주 순간적인 부분을 수십 행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축적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압축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압축은 더 이상 줄여지지 않는 길이를 전제로 합니다(36). 이런 면에서 보면 시는 매우 경제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발달과 디지털 혁명이라 불리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와 궁합이 맞는 문학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산문화의 경향입니다. 산문시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압축미와 운율의 맛을 찾기 어려운 시문이 시의 본질과 시대 변화에 부합하는 지에 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시가 난삽하다거나 해독이 곤란하다는 것은 독자의 경험과 시 이해 수준의 차이일 수도 있으나, 시인이 숙성되지 않은 사유를 시 속에 집어넣으려는 과욕이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자신의 사유와 인생관을 담아냅니다. 적어도 시인은 자신이 쓰고 있는 시가 어떤 사유와 어떤 목적으로 창작되고 있는 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소 난해하더라도 그것이 충분한 이유가 있다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낯설게 하기'라는 표현을 왜곡하여, 시맥과 아무런 연결점도 없는 '언어 비틀기'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상투적인 표현의 진부함과 지루함도 큰 문제지만, 비틀어진 언어로 나열된 시를 읽는 독자는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모름지기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관이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그 근본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판단하는 능력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역사가 이긴 자의 편이라면 문학은 패배하거나 좌절당한 자의 편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긴 경우라도 그 승리는 많은 사람들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피와 고통을 예술의 힘으로 치유하지 않는다면 문학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당대의 현실을 철저히 반영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적어도 당대의 현실을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이 어떤 세계관으로 시적 대상을 이야기할 것인가는 시 창작의 모든 문제에 앞서는 인생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50).

 

시인이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작품만을 생각하며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역사와 삶의 부분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쓰는 경우가 해당됩니다. 전자를 형식주의, 후자를 역사주의 방법이라 부릅니다(52). 이런 구분이 시를 연구하는 분들에게는 학문적 의미가 있겠으나, 시인이 꼭 하나의 주의만으로 시를 짓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시문학사를 펼쳐보면 수많은 시인들이 이리저리 분류되어 있지만, 나는 이런 구분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시 창작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인이나 어떤 목적과 가치에 관한 의도적인 시를 지을 수도 있고, 현실과 이상, 삶과 자연 등 다양한 주제로 시를 짓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 창작의 영토를 제한하는 편견이 똬리를 틀 수 있는 우려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로 말하지 시론으로 말하는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드리이든은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면 그 작품이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감동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감동이 있는 뭉클한 시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67). 시적 대상을 직관의 힘으로 꿰뚫어 보아야 감동이 나옵니다. 직관은 시적 대상과의 틈새 없는 결합(71)이기 때문입니다. 시적 대상을 자연을 매개로 했을 때 기왕에 그려진 모습보다는 당연히 새롭게 형상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86). 생태학적 상상력은 그 자체가 강하고 아름다운 생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87). 생활을 소재로 한 경우는 진솔하게 형상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변적이어서는 안 되며, 시적 감동의 차원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91). 역사적 사실, 또는 인물을 소재로 한 시의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단순한 과거의 재현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92). 과거의 역사적 인물에 대해 쓸 경우, 가능하면 그것이 화석화된 죽은 얘기보다는 오늘의 삶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과거만을 다룬 얘기는 생명력이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93). 인물을 소재로 할 때에는 그 인물의 특징적 면모가 실감 있게 그리는 것과 그 인물이 주제의식에 영향을 미치도록 설정되는 것이 좋습니다(94). 중요한 것은 시적 대상이 무엇이든 시는 감동을 캐내는 일입니다. 시는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라, 정화수에서 꺼낸 정제된 감성입니다.

 

시를 창작하면서 가장 먼저 걸리는 병이 추상적 관념병입니다. 시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병에 걸리게 되는데 쉽게 이 병에서 빠져나오는 수도 있고,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고 평생을 그 속에서 헤매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이 병에 걸린 대다수의 시인들이 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100). 관념에서 벗어나는 쉬운 방법 중의 하나가 '거꾸로 생각해보기'입니다. ''에서 그 반대편인 '어둠'을 생각해보고, ''에서 '', '바다'에서 '육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서 '밀실', ''에서 '', ''에서 '', ''에서 ''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내가 나무라면, 바위가 웅크린 짐승이라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면, 내가 너라면 우리가 인식하는 사유체계가 일시에 무너지며 다른 상상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에서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듣게 되는데 그것도 그 원리를 따지고 보면 이 '거꾸로 생각해보기'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112).

 

시적 대상에 대한 접근방법과 표현의 효율성은 통상적인 관념을 버리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주객의 전도, 생각을 바꾸면 시가 보인다(118)고 합니다. 시적 표현은 새로운 시어로 그린 신선한 그림입니다. 시어는 감성과 상상이 들어간 언어인데, 상투적인 뻔한 시어가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SNS나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문예지에 실린 시, 심지어 수상작이라는 시를 살펴보면, 회의감과 실망감이 교차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은 감정의 구정물들이 미사여구와 마구 뒤섞여 비말처럼 난무했던 시절이 있었나 싶습니다. 시인이 독자보다 많다는 이 시대 시인의 자화상은 천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천박하기에 천시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런 자화상을 만든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반칙과 술수가 하도 뿌리가 깊어 일상처럼 무디어지고, 오히려 융통성이나 능력으로까지 미화되고 있다 하더라도, 시문학조차 이런 시류에 편승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할 뿐입니다. 신선한 감정과 상상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 그것이 시의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시는 시가(詩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각 시대의 주요 장르, 이를테면 고대가요나 신라의 향가, 고려의 속요, 조선의 시조와 가사 등은 그 명칭이 가요(歌謠), (), (), (調)에서 보듯 노래로 불려졌습니다. 노래로 불려진다는 것은 그 길이나 가독성에 있어 분명 읽는 것만을 전제로 한 작품과는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고 있습니다. 이것을 잊고 있다는 것은 시가 갖고 있는 본래적 속성을 잊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시라고 쓰는데 그것은 시가 아닐 수 있으며 시 아닌 것을 쓰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시에 있어서 리듬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23).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음악이 분리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유시의 창작원리에는 리듬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습니다(24). 시의 본질을 얘기하는 데 있어 노래성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24). 시의 본래적 속성은 리듬이기 때문입니다. 시는 논리나 설명이 아니라 언어로 그린 소리입니다. 제발 세밀한 관찰 결과를 자랑스럽게 설명하지 마세요. 그건 산문에서 할 일입니다.

 

운율은 시에서 음성적 형식 곧 성조, 억양, 강세, 리듬 등을 포괄하는 수사적미학적 효과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악센트가 있는 음절의 일정한 배열로서 음악적인 효과를 유발합니다. 운율은 높이, 크기, 길이의 세 가지 운율 자질에 의해서 결정됩니다(127). 높이는 성대의 진동 속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성대의 진동 속도가 빠르면 높은 소리가 생성되고, 느리면 낮은 소리가 생성됩니다. 길이는 조음의 지속시간에 의해 결정됩니다. 크기는 강세, 공명도, 높이, 길이 등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결정됩니다(128). 운율은 곧 운(rhyme)과 율(meter)을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리듬은 기표의 '반복성'이며 동시에 이 반복성은 소리의 반복을 비롯하여 음절수, 음절의 지속, 성조, 강세 등 여러 상이한 토대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128). 운이란 운자의 제한, 즉 압운을 뜻하고, 율은 율격으로 음절수의 제한을 뜻합니다(128). 시인은 마땅히 운율을 공부해야 합니다. 시의 본질은 운율이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포스트모던 사조의 영향으로 시의 기준이 해체되어 '이래도 시고 저래도 시다'라는 목청에 편승하여 족보 없는 시들이 ''라고 뻔뻔하게 행세하지만, 시의 본질이 바뀔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음절이 모여서 낱말이 되고, 낱말이 모여서 어절이 되고, 어절이 모여서 문절이 되고, 문절이 모여서 문장이 됩니다. 이것을 시의 형태면에서 말하자면 음절이 모여서 음보가 되고, 음보가 모여서 행이 되고, 행이 모여서 연이 되고, 연이 모여서 한 편의 시가 됩니다. 여기서 음보란 음절이 모인 것 또는 행을 이루는 단위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음보율이란 이 음보의 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율격입니다(133). 운율은 시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통일성과 연속성과 동일성의 감각을 우리는 운율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138). 자유시와 산문시가 대세인 이 시대에 뭔 고리타분한 소리냐고 반기를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시나 산문시라고 운율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시라는 말은 본래 고전주의 시행인 12음절에서 시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19세기 후반 프랑스 J. 라포르그 등이 사용하기 시작했던 자유운문시에서 유래합니다(134). 산문시란 전통적인 운율에 의하지 않고 산문의 형식을 빌려 표현한 시를 말합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종래의 고전주의 운율에 반발해서 C.P. 보들레르가 <소산문시(1869)>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135). 산문시 창작에도 운율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대부분의 산문시 창작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내용만을 담기에 급급한 것은 아닌지, 언어의 시적 정감을 살려내고 있는지, 운율적 역동감은 있는지, 완급에 따른 호홉율은 가지고 있는지. 이들 방법 중에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분명 시가 아닌 산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146).

 

운율은 대체로 동일 음운 반복, 동일 음절수의 반복, 의성어와 의태어의 반복, 통사 구조의 반복 등 같거나 비슷한 짜임의 문장을 반복 사용함으로써 나타납니다. 이를 시 창작에 원용해보는 노력을 가져야 합니다(142). 나는 시조를 짓는 것이 시의 운율을 체득하는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조는 오랫동안 정형적인 운율을 잃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체질과 궁합이 딱 맞는다는 함의입니다. 시조를 짓는 것은 그 운율이 자연스럽게 자유시와 산문시에도 스며들어 재현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Julie 윤 20/09/04 [05:51] 수정 삭제  
  현대시 창작 강의 공감하고 배움하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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