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上(박지원 씀, 리상호 옮김, 2013) / 차용국

차용국 | 기사입력 2020/10/03 [22:35]

열하일기 上(박지원 씀, 리상호 옮김, 2013) / 차용국

차용국 | 입력 : 2020/10/03 [22:35]

▲ 열하일기 上(박지원 씀, 리상호 옮김, 2013) / 차용국  © 강원경제신문

 

열하일기 (박지원 씀, 리상호 옮김, 2013)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열하일기>는 조선 시대에 살았던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쓴 청나라 여행기입니다. '연암'이란 호는 박지원이 홍국영의 세도 정치를 피해 낙향하여 살았던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에서 유래합니다. 정약용(1762~1836)의 여러 호 중에 '다산'이 전라도 강진 유배지의 차나무가 많은 뒷산에서 유래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연암은 1780525일 청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길을 떠나는데, <열하일기>는 연암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는 624일부터 820일까지 열하를 거쳐 북경에 체류하면서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깨달은 모든 것의 기록입니다. 비록 두 달여의 견문이 18세기 후반의 한중 문물과 관계를 다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당시 한중 관계의 실상을 대변할 만한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것이 여행문의 가치이며 기록의 힘입니다. 기록이 역사입니다.

 

<열하일기>는 여러 번역가에 의해서 여러 버전의 책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 했습니다. 한문으로 된 원본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은 외국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번역가의 역량도 중요한 요인일 것이지만, 번역 시기와 출간 의도 등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번역물로 재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첨언하면, 번역가의 언어적 배경과 번역 시기에 따라 한글의 용어가 다르고, 독자를 누구에게 두느냐에 따라 책의 내용과 분량이 다양하게 편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이 책은 북한의 리상호가 번역하여 <조선고전문학선집>으로 이미 출간한 책을, 보리 출판사가 <겨레고전문학선집>으로 다시 출간한 책이므로 북한에서 사용하는 말이나 어법이 곳곳에 스며있고, 책의 편철도 3()으로 되어 있으며, 1권당 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입니다.

 

상권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연암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는 624일부터 89일 오전까지의 여행기록을 편철하였습니다. 중편은 연암이 89일 오후부터 820일까지의 열하와 북경 여행기와 그곳에 머물면서 당시 청국의 고관, 학자 등 다양한 인물들과의 담화와 양국 문물에 대한 견해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편은 중국 시인들의 작품과 시평, 장성 밖 지역에서 들은 기이한 이야기, 그리고 북경의 궁성과 명소 등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연암의 문학적 소양을 유감없이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 그럼, 이제부터 24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연암과 함께 여행을 떠나 봅시다. 우선 상권부터.

 

연암은 627, 압록강을 건너 120리 떨어진 '책문'이라는 곳에 와서 순 돌을 땅속에서부터 뽑아내어 일으켜 세운 것처럼 우뚝 솟아 있는 봉황산을 바라봅니다. 그 모양이 손가락을 세운 것 같기도 하고, 반쯤 핀 부용꽃 봉오리 같기도 하고, 여름 하늘 흰 구름을 뽑아내고 깎아 내고 도끼로 쪼개 놓은 것 같기도 하여 이루 형용해 말할 수 없다고 감탄 합니다. 다만 흠결이 있다면 맑고 기름진 맛이 없을 뿐이다(44)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평가는 일찍이 금강산을 보고 말한 감회와 같은 맥락입니다. 연암은 금강산은 골이 깊은 산으로 일만 이천 봉이라 하여, 별난 봉우리가 깎은 듯이 서고 우람차고 깊은 맛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산색이 어데고 뽑아낸 듯한 빛깔과 기름진 맛이 없어 미상불 금강산의 흠절을 두고 한번 탄식해 본 적이 있다(45)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한양의 삼각산 봉우리들이 하늘에 닿을 듯 푸르게 솟은 위에 영롱한 이내와 맑은 아지랑이가 자욱이 서리면서도 어데고 상긋거리고 한들거리는 듯한 풍치는 삼각산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45)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서울이 억만 년 도읍지로서 움직일 수 없는 산세는 그 주산이 보통 산들과는 마땅히 다른 바 있을 것이다. 이 산도 그 산세가 묘하고 높으며 빼어난 형상은 오히려 삼각산 도봉보다 더하다 할 수 있으나, 앞에서 말한 삼각산이 가진 여러 가지 자랑에는 멀리 미칠 수 없겠다(45)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연암의 산수관은 저 홀로 기암괴석의 절경을 자랑하는 것에 있지 않고, 세상을 품고 더불어 살아갈 만한 넉넉함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연암의 군자관을 엿볼 수 있는 은유적 언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연암은 628, 봉황성 구경에 나섭니다. 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연암은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데는 분명히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로 <당서>에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리요, 봉황성은 왕검성이라고도 한다고 썼고, <지지>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한다(70)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암이 주목하는 것은 '평양'의 위치입니다. 연암은 우리나라 인사들은 기껏 안다는 것이 지금의 평양뿐이냐(71)고 일침을 가합니다. 그러면서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붙여 놓고, 고조선의 엿 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구러들고 만 것(71)이라고 애석해 합니다. 이러한 까닭이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고조선 이래 평양은 요동을 비롯한 여러 곳에 있었고, 지금의 평양도 그 하나일 것이라고 합니다(73). 평양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역사가 되는 것이기에, 당시 성리학적 역사관의 틀을 깨는 진취적인 사관이라 하겠습니다.

 

연암은 (청국의) 벽돌로 벽을 쌓고 기와를 이는 법은 본받을 만한 데가 많다면서, 지붕에 진흙을 두지 않고 곧장 기와를 이고 틈을 온통 회로 발라 붙여 때우니, 쥐나 새가 뚫거나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한 폐단이 절로 없게 된다(67)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기와 이는 법은 지붕에 진흙을 잔뜩 올려 위가 무겁고, 의지할 데 없는 기둥이 허하며, 회로 때우지 않으니 비가 새고 쥐나 뱀이 구멍을 내는 온갖 폐단이 생긴다(68)고 합니다. 또한 연암은 동행한 정 진사와 성 쌓는 제도에 관해서 토론하면서, 정 진사가 ''벽돌이 돌만 못해요''라고 말하자, 연암은 ''우리나라 성곽 제도가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쓴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네''라며(76), 벽돌을 쓸 때의 장점과 실용성을 조목조목 말하고, 돌을 쓰면 바깥 모양은 반반해 보이지만, 단점이 많고 실용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연암의 실질 우선의 인식을 여실이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연암은 715, 신광녕에서 묵으며, 우리나라 인사들이 북경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만날 때는 으레, ''이번 걸음에 구경한 것 가운데 제일 장관이 무엇인가?'' 하고들 묻는다(224)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 제 딴에 일류 인사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볼 만한 것이 없었다고 말하고, 제 딴에 중류 인사는 성곽은 만리장성, 궁실은 아방궁 등을 말한다(225)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상류 인사들 사이에서 춘추대의를 위하여 중국을 떠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한다고 떠드는 자들에게 ''오랑캐로 부르는 오늘의 청조는 무엇이든지 중국의 이익이 될 만하고 그것으로써 오래 누릴 수 있는 일인 줄 일기만 할 때에는 억지로 빼앗아 와서라도 이를 지켜 냈고, 만약 본래부터 있던 좋은 제도가 백성에게 이롭고 국가에 유용할 때는 비록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손 치더라도 주저 없이 이것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227)고 비꼽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만 할 것이라며, 우리나라 백성들의 튼튼한 준비 앞에 저들의 굳센 갑옷과 날카로운 병장기가 맥을 쓰지 못하게 될 때에야만 비로소 중국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고 장담하는 것이 옳을 것(228)이라고 충고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원래 삼류 인사다. 내가 본 장관을 말하리라. 깨진 기와 조각이 장관이요. 냄새나는 똥거름이 장관이더라(228)고 말합니다. 연암의 해학과 익살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물론 240여 년 전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조선의 집권 세력의 시대착오적 편협함과 교만, 이런 시류에 편승해서 옳고 그름에 관한 신념도 없이 자신의 안위만을 즐기는 기회주의적인 위선자들을 향한 일침이지만, 지금 세태도 당시보다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섬뜩하고 씁쓸하기만 합니다.

 

연암은 재물의 원활한 유통의 중요성에 관해서도 한마디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연암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수레입니다. 연암은 중국이 재물은 풍성풍성하되 한쪽에 몰려 있지를 않고 쉴새없이 흘러 퍼지고 장사를 통하여 이곳저곳 옮겨지는 것은 모두 수레를 이용하는 탓이다(241)라고 말하면서, 조선의 영남 지방 아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강원도) 사람들은 주두나무 열매를 담아 간장을 대신하고 서북 사람들은 감과 귤을 분간 못 하고 바닷가 사람들은 멸치를 거름 삼아 쓰되 어쩌다가 한번 이것이 서울까지만 오면 한 움큼에 한 닢 값이니 얼마나 이것이 귀물인가?(242)라고 하면서, 이는 곧 가져올 힘이 없는 까닭이다(242)라고 합니다.

 

연암은 우리 조선에는 아직도 수레란 것이 없지만, 있다는 것도 바퀴가 똑바르지 못하고 바퀴 자국은 궤도에 들지를 못하니 수레가 아주 없는 셈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우리 조선은 산협 지대라 수레를 쓰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들 한다. 이런 당토 않은 소리가 어데 있을 것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고 있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 거리가 비좁고 산마루들이 험준하다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걱정이다(240)라고 일갈합니다. 당시 조선의 교통망과 재물의 유통 실상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후진적 기술 정책과 상공 제도에 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당시 혼탁한 집권 세력의 폐쇄적이고 근시안적인 무능을 질타하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열하는 만리장성 밖에 있는 황제의 행재소입니다. 강희 황제 시대로부터는 언제나 여름철이 되면 황제는 이곳에 두류하여 피서지로 삼았습니다(419). 여름철에 황제가 보내는 피서산장이라 하겠습니다. 연암은 17805월에 삼종형 금성도위 박명원을 따라 한양을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너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열하로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였습니다. <열하일기>는 당시 여정과 그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과 의식세계를 사진 찍듯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또한 한중 문물에 대한 날카로운 비교와 분석 기록만 보더라도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돋보이기도 합니다. 연암의 빼어난 문장과 박학다식한 학문적 소양, 그리고 현란한 해학과 기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책만으로 연암의 작품 세계와 사상을 다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양반전> 등 연암의 많은 작품과 융합하여 살펴보는 일도 의미를 더할 것입니다.

 

연암은 담헌 홍대용(1731~1783)과 절친이었고,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 지금 우리가 실학자라고 부르는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며, 박제가의 <북학의>에 서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당대의 신진 지성인이었습니다. 18~19세기 조선은 놀랍게도 이런 천재들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도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상은 집권층의 견고한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무능과 부패의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조선의 집권세력은 망국의 벼랑으로 달려갈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실학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정책을 주도하고 제도를 바꿀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중간관리자였고,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연암은 65(1801)에 마지막 관직인 양양부사에서 퇴직했습니다. 후대에게 명작을 남긴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추사 김정희(1786~1856)도 별로 다를 바 없었습니다. 중간관리의 직위와 유배로 점철된 이들이 현실에서 이상을 펼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다산은 그의 저서를 <목민심서>라 했을까? 세상에 나아가 구현할 수 없는 처지를 안타까워 하는 '마음의 글(心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 나라의 정책과 제도는 국가의 운명과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 퇴행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도자가 되고 집권세력이 된다는 것은 공식적인 힘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힘은 영향력입니다. 영향력이 많다는 것은 아집과 부패의 유혹도 그 만큼 많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비록 지금의 세상이 민주의 시대라 하더라도 이 근본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지도자와 지도층을 스스로 선택하고도, 그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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