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의 달력에 그린 소망

권덕진 시집『탱자』의 사계을 보다

강명옥 | 기사입력 2021/07/02 [07:19]

사계의 달력에 그린 소망

권덕진 시집『탱자』의 사계을 보다

강명옥 | 입력 : 2021/07/02 [07:19]

▲ 사계의 달력에 그린 소망

사계의 달력에 그린 소망

권덕진 시집탱자의 사계을 보다

 

차용국 시인·문학평론가

 

1. 디아스포라의 홀씨

 

마침내 인류는 오랜 유랑생활을 끝냈을까? 문명의 상징처럼 거대한 도시를 세우고, 지구촌 곳곳을 인터넷으로 연결한 시대. 휴대전화 하나로 언제 어디서나 정보를 공유하고 교류할 수 있는 시대. 하늘과 바다를 휘저으며 쉼 없이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시대. 이쯤 되면 인류는 고된 유랑을 마치고 정착의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정말 그럴까?

권덕진 시인의 시선은 현대 도시의 곳곳에서 여전히 유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포착합니다. 지난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도시라는 성을 쌓은 인류는 오히려 그 성의 미로를 헤매고 있습니다. 인류는 자신이 건설한 도시에서 유랑의 짐을 들고 갈 곳을 찾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의 눈에 비친 현대인은 도시의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공연을 마치고 또 다른 무대를 찾아 헤매는 노마딕의 후예일 뿐입니다. 초원을 잃어버린 디아스포라의 홀씨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속앓이랑

이제 접고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자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작은 소원에 소박한 꿈이라도

틔웠으면 좋겠어.

 

홀씨전문

 

홀씨의 화자는 직접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라는 숨은 화자가 시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적 대상은 홀씨입니다. 화자 가 삶의 여정과 소망을 자성하고 고백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어조입니다. 서정 자아인 가 시적 대상인 홀씨가 되어 지은 시라 할 것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서정 자아와 시적 대상이 하나기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를 동일화라고 합니다. 동일화에는 투사와 동화가 있는데, 자아가 시적 대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투사라 하고, 시적 대상이 자아로 들어오는 것을 동화라 합니다. 시적 자아와 대상이 되었을 때 좋은 시가 탄생합니다. 시작에 있어 동일화는 보다 풍성하고 단단한 의미가 내장된 시를 지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권덕진 시인의 시가 개인적 서정을 넘어 사회 보편적 서정으로 확장되는 것도 동일화의 시작법이 튼튼한 내공으로 체화되었기 때문일 듯합니다. ‘홀씨가 개인적인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애환으로만 느껴지지 않고, “한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도시적 삶의 보편적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도심 속 그림자보다 더 검게 그을린

그의 모습을 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도시의 노동자전문

 

어쩌면 권덕진 시인이 갈파한 것처럼 지금 우리의 삶은 고향을 잃어버리고 파편처럼 흩어져 도시의 찬란한 불빛 아래를 유랑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홀씨일 수도 있겠습니다. 초원의 고향에 가지 못하고, 아스팔트와 시멘트 틈새의 빌딩숲에서 살아간다는 것은/포기할 수 없는 처절한 몸부림이아니고 무엇인가?

 

삶이란

처절한 거야

눈감고 비행하지

말아야지.

 

-비행전문

 

한순간 한눈을 팔거나 정신을 놓을 수도 없는 삶이란/처절한 거라는 그의 말이 잠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왜 뛰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앞만 보고 달려만 가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속도의 마법에 걸려든 도시인의 삶은 마치 사자를 보고 본능적으로 질주하는 얼룩말과 다를 바 없는 처절한 몸부림이 아닌가?

 

2. 설행(雪行)의 노를 젓다

 

좋은 시란 무엇일까? 시인이라면 누구나 좋은 시를 짓고 싶어 하고, 독자라면 누구나 좋은 시를 읽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시가 좋은 시에 해당하며, 그 평가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명문으로 정한 규정은 없더라도 오랜 시문학의 발전을 통하여 형성된 관습이나 기준이 있다고 말해도 큰 실례가 아닐 듯합니다. 그 하나가 이미지입니다. 이미지는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지각을 통해 마음속에서 재생된 감각을 말합니다. 형상(形象)이라고도 합니다. 형상은 구체화된 이미지입니다. 시가 언어예술이란 점에서 시짓기는 결국 구체적인 이미지 만들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지엽 교수는 강렬하고 신선한 이미지 하나를 창조하는 일은 시의 성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권덕진 시인의설행은 현대 도시인의 삶의 실상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시라고 하겠습니다.

 

한계령 고개를 오르다가

폭설에 발이 묶여

세상과 고립되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처음 눈을 뜨는 눈동자에

은백색 꽃송아리

휩싸인 설원뿐이다

 

세상에 쫓기듯

찾아온 지독한 외로움

그 자리 선 채 얼어붙었다

 

눈벌판에 파묻혀

가로막힌 상고대 능선 즈음

잔눈발에 흩어져도 좋다

 

썩은 그루터기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할 곱은 마음

송두리째 부서져도 좋다

 

온몸이 해지도록 눈꽃 바람에 휘돌다

산바라지 돌아설 인연이라면

애오라지 품지 못할

헛된 맹세일 뿐이다.

 

- 설행전문

 

사람은 밥과 꿈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합니다.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함의입니다. 삶의 길에서 양 수레바퀴가 균형을 이루고 잘 굴러갈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꼭 그렇게만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사인 듯합니다. 때로는 사각바퀴를 메고 진흙탕 길을 걸어가는 수난의 시절을 견뎌내야만 할 때도 있고, “폭설에 발이 묶여/세상과 고립되어” “지독한 외로움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한 번쯤은 온 몸이 아프도록/홍역을 치르고 가슴앓이를 겪는(노를 젓다일부)것이 인생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꿈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꿈마저 포기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꿈은 추억과 소망으로 만들어가는 세계입니다. 사람은 추억과 소망의 뜨락에서 존재의 이유는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꿈은 삶의 부침을 견뎌내는 힘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권덕진 시인이 삶을 설행에 비유하여 강한 영상처럼 보여주며 봄을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소박한 민중의 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해마다 향기 품고 오시는 그대를/기다리는 것은/지난 상처를 잊고/새봄을 맞이하고픈 이유(봄비일부)라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상처받은 아픔의 잔영을 떨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소망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여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동안 마음고생 하느라

저 강물도 꽁꽁 얼어붙었지

때가 되면 돌아올 거라고

묵묵히 기다리는 것

묵은 체증을 내려놓는 거겠지

그대와 맺지 못한 설익은 풋사랑도

어쩌면 실려 오겠지

쉬이 풀지 않는 독한 심술도

초록빛에 여문다

 

우수전문

 

잘 아시겠지만, 우수는 219일 또는 20일 무렵으로 24절기 중 두 번째입니다. 그는 우수가 되면 눈과 얼음이 녹아 비가 되어 새 생명의 싹을 돋아나게 하듯이 때가 되면 돌아올 거라고/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삶이라며 토닥입니다. 겨울은 보통 시련을 상징하는데, 이 시에서 겨울이란 말을 직접 쓰지 않았더라도 어렵지 않게 그것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나아가 이 시를 반복 음독하다보면 겨울의 이미지는 매일 그저 그런 날들이라고 홀대했던 일상으로 전이되는 느낌이 전해질 것입니다. 일상의 소중함이 우수가 되어 해빙의 기운을 타고 찾아온 것처럼.

사실 사람은 거창한 것에만 소망을 빌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생명의 최고 가치와 최선의 선택은 생존과 유전입니다. 인류는 고단한 진화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하루하루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에 최고 최선의 행복을 느꼈던 것입니다. 인류가 시련의 계절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우수가 되면 돌아올 해빙의 계절에 대한 기다림 때문입니다. 권덕진 시인은 이러한 인류의 보편적 기다림의 서정에 어울리는 이미지와 어조로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삶을 우수에 비유하여 노래한우수9행의 짧은 시이지만 전하는 이미지와 어조는 선명하면서 다정합니다. 르네 웰렉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중요한 원리는 어조와 은유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미지뿐만 아니라 어조도 좋은 시의 서정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어조는 화자 자신 또는 독자를 향한 태도이기도 합니다.우수의 어조는 자기 성찰적이며 겸손합니다. 권덕진 시인의 체화된 진솔함이 전해집니다. 시향에 딱 맞는 어조가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려 속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풀죽은 삶과 꿈을 위로하며 일으켜 세우는 희망의 노래처럼.

 

꽃을 피우기 위해

초목은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샘 깊은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지

 

가파른 절벽에 몸을 세우고

천년을 수행하는

노송의 그윽한 자태는

 

나를 비우고

끊어내는 것이다

작은 여울이 바다를 삼키고

거대한 불길도

고요한 침묵을 깨우는

잎새의 움트는 기운이다

 

- 혼불전문

 

혼불의 어조는우수의 어조와는 사뭇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혼불의 어조는 얼핏 보면 기운이 넘치고 단호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어조는 자칫 소리만 큰 교훈시의 상투적 표현으로 오해될 수도 있고, 뻔한 허세처럼 보일 수도 있어 거부감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권덕진 시인의혼불이 전하는 느낌은 조근 조근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송의 그윽한 자태처럼 친밀한 영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것은 이 시가 철학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깊은 관찰과 성찰에서 우러난 깨달음을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고백적인 어조의 시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권덕진 시인은 이미지와 어조의 어울림을 통해 난해함 보다는 선명한 표현에 주목합니다. 독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일찍이 T. E. 흄은 시의 중요한 목적은 정밀하고 명확한 표현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시가 함축과 은유의 언어로 부르는 노래라 하더라도 모호함 보다는 선명한 영상과 같은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요컨대 시는 이미지와 어조가 딱 맞는 옷을 입을 때 빛이 난다고 하겠습니다. 권덕진 시인의 시가 독자와 친밀하게 공감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섬세한 이미지와 어조의 속성을 적절히 배합해서 조화롭게 살려내기 때문일 듯합니다.

 

3. 울림은 깊어 세상을 품고

 

시는 설득 보다는 암시의 문학이라고 합니다. 암시는 비유의 수사법, 특히 은유(metaphor)의 언술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은유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말할 때 그것 자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이나 사실과의 비유를 통해서 두 사물(사실) 간의 유사성을 압축시켜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시짓기의 사례에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적으로 결합하여 둘 사이에서 강한 탄력성을 생성하게 하는 표현 기법이라 하겠습니다. 은유는 시의 가치와 생명력의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여 새롭고 낯선 의미론적 전이가 발생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성이 우직한 황소는

단 하루 허투루 살지 않는다.

일찍 가장이 되어버린 그의 어깨 위로

짓누른 삶의 무게를

오롯이 홀로 짊어지고 감내하며 살아가야만 했다.

들밭에서 진종일 고단한 생을 일궈야

울타리를 지킬 수 있다고,

한 줌 여유마저 품지 못한 삶이었다.

 

등골이 휘도록 터를 닦아야 했던 황소,

제 한 몸마저 희생하며

묵묵히 땅을 일구고

터전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황소는

이 땅의 아버지다

 

- 황소전문

 

이 시는 아버지를 황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치 가족사진첩을 들추어 꺼낸 흑백사진에서 풍기는 뭉클한 개인적 서정이 느껴집니다. 한편으로는 황소로 비유되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이 땅을 지키고 일구며 살아온 민중의 삶을 대변하는 은유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황소의 이미지는 아버지에서 민중으로 전이 또는 확장되어 사회적 보편성의 의미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짓누른 삶의 무게를/오롯이 홀로 짊어지고 감내하며 살아가야만 했다는 황소는 한 줌 여유마저 품지 못한 삶이었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이 땅의 아버지, 고단한 삶을 삶아온 민중의 상징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수사법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상징은 은유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상징을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유사성에 근거하기 때문일 것합니다. 다만, 상징은 은유처럼 딱히 이것이라고 할 만한 원관념이 들러나 있지 않아서 다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일 것입니다. 은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의 관계라면, 상징은 그 관계가 1:()라는 점이 특징이요, 양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권덕진 시인은 여러 시에서 은유와 상징의 경계를 넘나드는 수사적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이 시속에 녹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시짓기의 사례에서 보면 은유와 상징의 구별 실익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시인은 영감이나 직관 등으로 시를 짓는 것이지, 시론으로 시를 짓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시적 표현이 은유냐 상징이냐가 아니라, 그가 전하려고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의 목적이고 울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 위에 오월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짓밟힌 잡초만이 꺾이고야 말았습니다

울부짖는 메아리 소리만

강산을 돌고 돌아

오월의 장미 가시보다 붉게 박힙니다

그 거리에 피우지 못할 꽃잎의

애끊는 그리움만 떨어지고

오월의 함성은 휘날리는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전문

 

이 시에서도 오월의 의미를 딱히 한 마디로 말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단순하게 사계의 다섯 번째 달력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오월로 볼 수도 있지만, 사회적 의미의 영역으로 전이 또는 확대된 측면에서의 오월의 의미를 찾아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짓밟힌 잡초만이 꺾이고야 말았습니다/울부짖는 메아리 소리만/강산을 돌고 돌아/오월의 장미 가시보다 붉게 박힙니다라는 시문이 전하는 오월의 의미를 개인적인 서정으로만 소극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일 듯합니다.

사회적 또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우리 현대사의 오월이 갖고 있는 의미와 연관시켜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에 비유하여 접근해 보면, 개인적인 서정과는 전혀 다른 낯설고 새로운 시향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은 독자입니다. 각각의 독자에 따라 수많은 다양한 공감의 영토가 생성될 것이고, 전해지는 울림도 거의 비슷할 듯합니다.

한 편의 시가 세상에 나오면 그것은 독자의 것이고, 시인도 독자의 1인일뿐입니다. 각자의 독자가 살아온 인생 여정에서 무의식에 기대어 체화된 공감이 사회적 보편성을 형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권덕진 시인이 펼치는 다의성 풍부한 언술이 개인적 서정을 넘어 사회적 보편성을 이루고, 그것이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일 듯합니다. 이러한 시향을 구체적으로 품고 있는 시 한 편을 더 보겠습니다.

 

눈을 감아도

귀를 열고서도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있다

 

반만년 이어져 온

백의민족의 슬픈 자화상을

 

무참히 짓밟고

끝없는 아픔을 주는 오욕의 세월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민족자존을 지키고 싶다

황소의 맑은 눈망울을 닮은 민족이여,

홀연히 분개하자

 

마른 눈물만 떨구었던

저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상처를

상흔에 새기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꺾이어 동강 날지언정

이 땅을 끌어안고

산화하신 영웅의 서사시를

초개처럼 사라진 영령의 혼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녹두꽃전문

 

권덕진 시인은 녹두꽃에 주목합니다. 녹두는 콩과의 한해살이 식물이며, 흔한 농작물입니다. 녹두전과 녹두묵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민중의 식량이면서 수입원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정덕진 시인은 이런 녹두꽃에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녹두꽃에 사회적·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언술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녹두꽃은 반만년 이어져 온/백의민족의 슬픈 자화상으로 전이(확장)되면서 상징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상징(symbol)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비유적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은유가 비유적 의미만 가지고 있다면 상징은 다의성과 암시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구별 실익이 있는데, 문맥에서 의도적인 반복 또는 이야기의 알맹이를 끌어냄으로써 만들어집니다.

권덕진 시인은 마른 눈물만 떨구었던/저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상처를그리고 이 땅을 끌어안고/산화하신 영웅의 서사시를끌어옵니다. 녹두꽃과 역사적 사건의 동일화가 이루어지는 지점에서 탄생한 시라 하겠습니다. 우선 녹두꽃이 암시하는 시선을 동학 농민 혁명으로 돌려봅니다. 녹두 장군이라 불렸던 전봉준과 농민들의 봉기는 이 땅에서 핍박 받으며 살아온 민중의 처절한 저항과 소망의 발현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권덕진 시인이 녹두꽃에 역사적 상징성을 부여한 것은 무참히 짓밟고/끝없는 아픔을 주는 오욕의 세월을을 견디며 살아가는 민중의 삶이 과거만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일 듯합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현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삶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자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권덕진 시인의 녹두꽃은 힘없는 민중의 삶의 애환과 소망의 상징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반듯하게 자란 나목이

좋은 재목이라고

숲을 가꿀 때

 

속살이 파이도록

상처를 남겨도

세상에 싹을 튀우고

옹이는 생명을 잉태한다

 

고운 살결에 박힌 옹이는

얼마나 억척스레 살아왔는지

나이테에 새겨놓는다

 

생살을 찢고 단단하게 움켜쥔 어깨는 안락한 보금자리

거친 세상을 지켜냈다

 

- 옹이일부

 

많은 시련을 견뎌내며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민중의 삶은 그 자체가 시가 됩니다. 옹이가 상징하는 민중의 삶은 언어로 다 재현할 수 없는 드라마일 것입니다. 권덕진 시인은 민중의 숭고한 생명력을 속살이 파이도록/상처를 남겨도/세상에 싹을 튀우고/옹이는 생명을 잉태한다고 노래합니다. 갇힌 역사를 끌어내어 공공연하게 펼쳐 보이는 것도 시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역사의 현상에서 희생양이 된 비극적인 민중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것도 시인의 사회적 책무일 것입니다. 역사는 숨긴다고 묻혀 지거나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곡한다고 진실이 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재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권덕진 시인이 말하고 싶은 속내일 듯합니다.

 

4. 희망의 시를 짓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개인이 직접 알 수 있는 것은 의식뿐이고, 무의식은 자신도 모르는 언행으로 표출되곤 합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J. Lacan)의 말을 빌리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어서 무의식의 압축과 전치가 언어학의 은유와 환유와 동일하다고 합니다.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주체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며, 이 분열의 간극을 채우기 위한 욕망(Begelsen, desir)이 상징체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상징체계는 기본적으로 기호체계로 이루어졌습니다. 기호는 의사전달을 위한 의미의 매개체이므로 상징의 의미는 기호를 통해서 전달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호는 언어, 음악, 그림, 사진, 암호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지만,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 하겠습니다. 문학, 특히 시는 언어의 함축을 모태로 하는 상징물이라 해도 좋을 듯합니다. 시어가 다의미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이런 속성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상징이란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하나의 관념을 암시하거나 환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권덕진 시인의 신작 시집탱자를 펼쳐보면 눈에 확 띄는

언어가 희망입니다.

 

한 번쯤 길을 잃은 사람은 안다

마음 시린 바람쯤

아무것도 아니란 걸

 

가슴속에 별 하나 품어본 이는 안다

밤하늘에 숱한 별만큼

쓸어내기 힘겨운 걸

 

-여우별일부

 

권덕진 시인이 체험하고 깨달은 삶은 기쁨과 아픔이 공존하는여우별같은 공간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섬세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비록 아픔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지향하는 세상은 희망을 품고 기다리며 정진하면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곳이다. 그곳이 그를 둘러싼 삶의 현실에 있는지, 상상 속에서 이상향의 그림처럼 있는지를 따져볼 실익은 거의 없을 듯하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곳이 어디에 있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건, 그는 그곳을 향한 미세한 눈빛의 울림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 힘을 얻고, 시를 짓기 때문이다. 삶과 시가 어우러진 시공간, 바로 그곳이다.

 

아직 남아있는 약속 있거든

먼 햇살이 산등성이

하얗게 뒤덮기 전

돌아오게 하소서

 

봄여름 지나도록

오지 않는 기다림 있거든

푸른 산빛이 눈동자를 붉히기 전

한 송이 들국화로 피어나게 하소서

 

가벼운 유혹보다

고고한 꽃빛으로 산하를 덮고

늦기 전에

오래도록 마음속 머물게 하소서

 

- 들국화전문

 

권덕진 시인이 삶에 임하는 태도와 소망을 솔직하게 기원하는 시라 하겠습니다. 그는 들국화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는 생업에 종사하며 시를 짓는 시인입니다. 그럼에도 늘 다작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은 다양한 각도에서 삶과 사물을 바라보는 순박한 눈과 열정을 가졌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하루하루 살기 위해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왔지만 마음 귀퉁이에 허기진 영혼은 무엇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지요. 매일 습작하는 마음으로 담아보았습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마음의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1시의 사계일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권덕진 시인의 일상은 생업의 시공간에서 늘 허기진 영혼의 먹거리를 찾는 일입니다. 무엇으로 허기진 영혼을 채울 것인가? 그가 선택한 것은 시입니다.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니 짓고 또 지어야 할 숙명 같은 것입니다. 그는 허기진 영혼의 먹거리를 찾아 매일 사계의 뜰을 거닐며 보고, 듣고, 생각한 서정의 기록을 다듬어 신작 시집탱자를 출간했습니다. 축하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졸필의 해설을 붙였습니다. 거듭 축하드립니다. 우리 밥 한 번 먹어야겠습니다!

 

처음 인연을 맺을 때

서슴없이 밥 한번 먹자고 청한다

 

밥 한번 함께 나누는 것

교감할 수 있는 사이

신뢰할 수 있는 호의를 갖는다

 

심장이 뛰는 열정도

당찬 포부도

든든한 뱃심이다

 

밥 한번 먹자는 것

그대에게 가고픈

인연의 시작이다

 

다가와 청하기 전

밥 한번 먹자고 해보자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이 흐른다

 

은원이 있다면 매듭을 풀자

인연의 끈을 잇고 싶을 때

주저하지 말고

"우리 밥 한 번 먹자.“

 

- 밥 한 번 먹자전문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주간베스트 TOP10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