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을 지나던 숱한 시선들 강물 따라 흐르던 별 그림자 길섶 보도블록에서 새하얀 웃음 짓던 민들레조차 보았다고 했다
내 눈길 머물던 곳 내 발길 닿던 곳 그 어디에나 뒤돌아 젖은 눈 닦아내던 넌 있었지만 정작 나만 보지 못했다
너의 사랑은 늘 가까이 있었지만 네가 떠나버린 뒤에도 한동안 깨닫지 못했던 무딘 나
- 후회할 자격조차 없었다 -
52. 성도에서의 첫날
저녁 8시가 되자 방동혁 부장과 박수현 차장, 그리고 이선 과장이 같이 모여 차례로 연수의 룸으로 들어왔다
호텔 내에는 비즈니스를 위한 공간이 따로 없어서 연수는 회의실 겸 조선족 동포 통역 인원들을 면담하기 위해 비즈니스룸으로 방을 예약했었다
연수는 이선 과장과 산책을 나섰다가 같이 저녁 식사도 하고 카페에서 차도 한잔 마시고 나서 돌아왔고, 방부장과 박차장은 호텔 내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고 했다
잠깐의 휴식이었지만 모두 얼굴에 생기를 띠고 있어서 연수는 휴식시간을 갖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선 과장과의 깜짝 데이트는 괜찮으셨나요?"
방안에 비치된 캡슐커피를 한 잔씩 추출해서 잔을 들고 테이블에 둘러앉자 방동혁 부장이 먼저 농담을 시작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연수의 한참 후배이긴 하지만, 기현자동차 해외영업본부의 수출기획팀에서 근무하면서 연수와의 업무교류가 많아 평소에도 허물없이 농을 주고받았던 사이였다
"그런 얘기는 당사자들이 듣기에 성희롱으로 비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지요."
연수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이선 과장이 우리한테 먼저 자랑하던데요?"
방부장이 물러서지 않고 야릇한 미소를 띠며 대답한다
"자자, 쓸데없는 농담은 그만하시고, 내일부터 각자가 해야 할 일들을 점검해 봅시다."
연수가 서둘러 방부장의 농담에 끌려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회의 얘기로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방부장이 놀리듯이 입을 삐죽 내미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저와 박차장은 내일 아침 식사 후에 바로 차량 시트와 플로어 매트를 납품하고 있는 <태수>라는 업체를 방문해서 감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태왕그룹의 주력 계열회사로써 회사 규모가 제법 커서 내일은 종일 거기서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무석에서 그랬던 것처럼 구매나 생산관리 파트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방부장의 얘기가 끝나자 이선 과장이 바로 이어서 의견을 내놓았다
"<태수>에 가시면 바로 류태진이라는 통역요원을 찾으시면 됩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이기도 하고 눈치가 있어서 아마 잘 도와줄 겁니다.
오늘 오후에도 통화해서 잘 일러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통역요원이 눈치가 빠르다는 얘기는 통역을 하면서 곧이곧대로, 직설적으로 통역해서 상대방에게 전달하기만 하지는 않고, 할 얘기와 하지 말아야 할 얘기를 적절히 골라서 통역을 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른 국가의 언어도 그렇지만 중국 사람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는 다를 뿐만 아니고 그 의미조차 다르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아서 자칫 통역을 잘못하면 큰 싸움이 나거나 중요한 협상이나 회의가 깨져버리는 경우도 많고, 통역사들이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 또는 어느 편에서 통역을 해주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곤 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이선 과장은 아마 류태진이란 친구에게 부탁해서 방부장과 박차장의 편에서 도움을 주라고 얘기를 미리 해놓았을 것이었다
이선 과장이 이어서 말했다
"내일 아침에 류태진에게 다시 한번 전화를 해서 두 분을 잘 도와주라고 얘기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상무님께서 면담할 첫 번째 친구가 열시에 이곳으로 오기로 되어 있고, 오후에도 면담하셔야 할 대상이 두 명이 더 있습니다. 저는 그들과의 면담을 어레인지하고 상무님과의 면담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방부장님과 박차장님, 두 분이 감사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문제가 생기면 제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바로 달려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선 과장이 우리 팀에 합류하니 팀 분위기도 바뀌고 아주 든든합니다. 장상무님은 일 얘기만 하시고 별로 재미가 없었거든요."
이과장의 얘기를 듣고 있던 박차장이 웃으며 얘기했다 모두 따라서 웃었다
박차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과장이 합류한 뒤부터 팀 회의나 같이 모여서 하는 식사 자리에서 부쩍 웃는 일이 많아졌고, 이과장의 거침없고 밝은 얼굴에 팀 분위기도 휠씬 부드러워졌을 뿐만 아니라, 팀의 전력에도 이과장은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었다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도 이과장의 적극적인 지원에 정말 감사한 마음은 두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내일 첫 번째 면담자가 소청화학에 근무하는 친구라고요?"
연수의 질문에 이과장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한경 상무가 일부러 연수에게 전화해서, 정보를 줬었던 소청화학에 대해 조선족 통역사로부터 얼마나 많은 정보를 더 알아낼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연수는 살짝 긴장하며 그와의 면담이 기다려졌다
"상무님! 회의도 대강 정리된 것 같은데, 지금 시간에 밖에 나가기도 그렇고 식사도 다 했으니 여기서 시원하게 맥주나 한 잔씩 하시면서 오늘 이과장이 상무님과 팔짱을 끼고 강변을 걸었다는 살짝 데이트에 대해 더 대화하시는 건 어떨까요?"
방부장이 아까 하다 만 농담이 끊어져 아쉽다는 듯이 다시 그 얘기로 화제를 전환하자, 이선 과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 룸 안에 비치된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연수는 더 이상의 대꾸를 포기하고 그냥 웃기만 했다
성도에서의 첫날 밤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註 : 본 시소설은 가상의 공간과 인물을 소재로 한 픽션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강원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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