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타고난 성품이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이르고 자연이 만든 인간은 모두 선하다 했으니
맹자든 루소든 대양의 동서에서 현인들의 인성은 본디 선하다 했으니
선량한 마음이 없으면 고백은 거짓이요 자백은 허위이고 선언은 허구다
- 양심선언 -
67. 양심선언
"사실 놀랄 일도 아니오. 그동안은 그룹 회장의 신임을 등에 업고 중국 사업은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마음대로 주물러댔는데 가뜩이나 노쇠하여 판단력이 떨어진 그룹 회장께서 이제는 늙어 경영에서 손을 뗄 때가 다가오니 왕영홍 부회장도 슬슬 준비하는 것으로 봐야지요.
자기가 키운 중국 사업이니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며 호언장담하는 것을 몇 번 들었는데, 그때마다 '저 사람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예청시 당서기인 이건웅 동사회장과 상달그룹 장송 총경리는 그동안 들인 공이 있으니 이미 자기 수중에 들어왔다고 보고 있고, 동방그룹 역시 같은 중국 핏줄이니 결국은 한통속이라고 봐도 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지금처럼 중국 사업이 어렵고 적자가 계속되면 예청시나 강소성의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3방 간의 파트너쉽을 깨트리고 기현자동차 중국법인을 통째로 와해시킨 뒤 자기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공산당 조직과 예청 시정부의 힘을 이용해서 기현자동차에 30년간 임대형식으로 불하해준 토지를 임대기한이 끝나는 2025년에 재연장해주지 않고, 몰수해서 다시 자기들이 불하를 받으면 되는데,
이를 위해서 MH그룹의 중국 사업이 경쟁력도 없고 파트너쉽 관계 지속이 어려워 더는 중국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명분을 얻거나,
아니면 다른 약점을 꼬투리 잡아 북경의 MH자동차는 몰라도 최소한 예청의 기현자동차 중국법인은 자기들이 챙길 수 있다고 계산하는 거지요."
이상일 전무의 말은 상상하기조차 싫고 듣기도 싫은 이야기였지만, 왕부회장이나 장송 총경리가 그동안 보여준 성향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야망을 고려하면 딱히 틀린 얘기가 아니었고 충분히 그러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연수의 전신에서 갑자기 전율이 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털이 곤두서 일어나는 것 같고, 머릿속은 복잡해져 연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야 그동안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응당 책임을 지고 쫓겨나거나 감옥에 가면 되겠지만, 기현자동차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애정과 양심의 가책에서 이런 주제넘은 충고를 드리는 것이니, 지금이라도 기현자동차와 MH그룹이 정신 바짝 차리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나는 월요일 출근하는 대로 사직서를 써서 장상무에게 팩스로 보내고, 그 시간부로 왕부회장님과는 연락을 끊으려고 합니다. 왕부회장님이 아시면 노발대발하실 거고, 그분이 분노하면 저도 감당이 안되어서... 그러니 내 인사문제는 본사에서 알아서 처리하시지요."
그동안 왕부회장의 수족으로서 겉으로는 기현자동차를 위하는 척하고, 뒤로는 알게 모르게 기현자동차 중국법인을 갉아먹고 있었던 이상일 전무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라며 해주는 충고와 스스로 거취를 정해 사표를 내고 자신의 인사문제는 본사에 일임하겠다는 그가 한편으로는 역겹기도 했지만,
현실은 중국에서의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든 기현자동차와 MH그룹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고,
왕부회장이나 장송 총경리가 그런 반역을 꾀할 빌미를 만들어 준 것도,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이 지경까지 끌고 온 최고경영층의 판단 미스와 관리부실 책임이 더 컸기 때문에 연수도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상일 전무의 귀임 발령 처리에 발이 묶여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던 강춘권 부사장이나 여상동 전무의 고민을 해결해줄 이상일 전무의 자발적인 사직서 제출 얘기는 내심 반가운 얘기이기도 했다
한참 동안 생각을 거듭하던 연수는 어느 순간 마음이 조급해져 오자 빨리 이상일 전무와의 이 자리를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전무님께서 마음을 바꿔 전무님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씀해주시고 스스로 거취도 정해주셔서 저 개인적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전무님 말씀은 내주 초, 최고경영층에 보고드릴 보고서 내용에 추가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저는 여기 푸동공항에서 마지막 비행기 편으로 한국에 돌아갈 예정이니 이 시간 이후에라도 제게 더 해주실 말씀이 있거나, 생각나는 게 있으면 언제든 제게 연락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알았소. 기왕에 뒤늦은 양심고백이라고 장상무에게 다 털어놓았는데, 내가 더 이상 숨길 게 뭐 있겠소.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다 얘기할 테니 장상무도 추후에 필요하면 언제든 내게 연락하시오. 왕부회장 전화는 안 받아도 장상무 전화는 언제든 받겠소.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다 식었긴 하지만, 남아있는 차도 마시면서 오랜만에 황포강의 야경도 좀 구경하고 생각할 것도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장상무는 먼길 가야 할 사람이니 어서 일어나시오."
이상일 전무의 작별인사에 창밖을 보니 황포강에는 벌써 어둠이 짙게 깔려 강물은 검게 변해있었지만, 강의 양안에 늘어선 빌딩에서 쏘아대는 오색 빛, 화려한 조명을 반사하며 은빛 비늘을 만들어내고, 이 조각들이 다시 흩어져 강물을 따라 흐르고 있었고, 유람선 선착장 주변이나 사람들이 서 있을 만한 공간에는 여지없이 꽉 들어찬 사람들의 움직임이 또 다른 강물을 만들어 흐르고 있었다
연수는 이전무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2층 카페를 내려와 택시를 집어 타고 푸동공항으로 향하면서 여상동 전무에게 곧바로 전화했다
註 : 본 시소설은 가상의 공간과 인물을 소재로 한 픽션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강원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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