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林森의 招待詩 -
나, 그림자
이파리마다엔 형형색색 물감범벅 울긋불긋 홍엽의 세상 단풍나무 기대선 손바닥 하늘
두런두런 바람소리 아련하고 풋풋한 가을햇살에 기름 자르르 흐르는 창밖 단풍나무 아래 허공 어디쯤 나, 그림자,
옆동네 마실가듯 느릿느릿 하늘길 걷는 시간, 쉬엄쉬엄 정지된 초침속으론 가을 노릇노릇 맛있게 익어가는 시월중순, 가만가만 숨쉬는 한우주
저녁나절 성큼 배꼽시계 멀리 보이는 반쪽 산잔등엔 어느새 계란노른자처럼 해 아름다이 걸렸다
시월이 꺾인다
- 시(詩)의 창(窓) -
오늘은 영화 이야기로 시의 창문을 열어보려고 한다. 지난 2007년에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 봄에 개봉되었던 비교적 오래 된 프랑스 영화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잠수종과 나비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라는 제목의 영화다. 아마도 내용을 아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먼저 영화를 짧게 표현해본다. “패션잡지 ‘엘’의 편집장이자 두 아이의 아빠인 ’장 도미니크 보비‘는 출세 가도를 달리던 중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으로 교통사고를 일으키면서 온몸이 마비된다. 한 쪽 눈꺼풀을 깜박여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배우는 보비. 기억과 상상으로 자유를 향해 날아가는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수작”이라는 막연한 감상평 정도로 일단 요약할 수 있겠다.
영화가 주는 멧세지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고 훨씬 더 집요하며 심오하다. ‘침묵에 빠진 육체,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 비록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쪽 눈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과 소통하기엔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 막연한 주제를 풀어가자면 어디서부터 생각을 정리해야 할까? 처음부터 갈피를 잡기가 수월치 않은, 난해한 속 뜻이 많이 내포되어 있는, 이른바 잔잔하게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영화다.
‘칸 감독상’ 수상, ‘골든 글러브’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수상, ‘아카데미’ 감독 상, 촬영상, 각색상, 편집상 노미네이트, 이렇듯 알짜배기의 화려한 수상 이력은, 필자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확실히 좋은 홍보문구가 분명하다.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절에, 충분한 여건과 상황을 구비하면서 개봉의 준비를 끝마쳤었다. 그리고 당시에 필자는 운 좋게 이 영화의 시사회에 초청받아, 개봉보다 다만 며칠이라도 빨리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신파다. 그러나 이 영화의 중요한 점은 단순히 신파로서 머무르지 않고, 그 전에 우리에게 신체불구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이전의 그 어떠한 영화보다 설득력 있고 밀접하게) 그려 넣었다. 우리가 신체불구자를 바라보며 가져왔던, 그저 ‘불쌍하다.’ ‘안 됐다.’라는 주관적 타자의 입장을 깨끗이 지우고, 주인공인 장 보비의 행동과 고통을 철저하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영화 한 편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이즈음에 갑자기 ‘육체와 영혼의 자유’라는 화두에 빠져 해결책과 방향을 찾지 못하면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평생 추구해오는 진정한 자유라는 건 대관절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만상 중에 무엇에 속해 있으며, 일상에서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는 걸까?
그렇게 이 작품을 통해서 필자는 상실되었던 자유의 끝을 본다. 희미하게라도 다가서는 진솔한 자유의 손짓을 읽는다. 그림자에게 뺏겼던 자유의 밭에 희망을 씨뿌림한다. 그리고 이제는 눈 들어 감히 모든 사람들에게 제언한다. “삶에게 진실하고프면 이 영화를 만나보세요. 자신에게 솔직하고프면 이 책을 접하세요.” 이미 마음만 먹으면 주위에서 영화(DVD)나 원작인 책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찾아보자.
사실은 원작의 제목은 ‘잠수복과 나비’다. 물론 잠수종이냐 잠수복이냐의 차이는 크지 않다. 장 보비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방법은 책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왼 쪽 눈꺼풀 밖에는 없었기에 방법은 고통스러울 만큼 지루하고도 간단했다.출판사 직원이 알파벳을 외기 시작하면 자신이 원하는 단어에서 왼 쪽 눈을 깜박이는 것이다.
유일한 의사 소통 수단인 왼 쪽 눈꺼풀을 깜박거려 써내려 간 글이 하루에 반 쪽 분량, 15개월 동안 20만 번 이상 깜박거려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원작이다. 그렇게 130페이지의 수기를 1997년 3월에 출간해냈고¸ 책이 출간된 바로 그 주에 그는 ‘정말로’ 죽었다. 마치 마지막까지 숨을 쉰 의미가 책의 완성이었던 듯 하여 소름이 돋는다.
아무튼 장 보비가 마지막 생명력을 쏟아부어 쓴 이 책은, 길지 않은 그의 삶에서 일어났던 일화들을 풍자와 유머로써 진솔하게 묘사하여 우리를 먹먹하게 만들었는데, 책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말한다.“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요? 다른 곳에서 구해보아야겠습니다.나는 그곳으로 갑니다.” 결국 인간 장 보비는 잠수종인 현실의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그러나 영화를 제작한 감독 줄리앙 슈나벨이 만든 장 보비가 날아올랐는지는 알 길이 없다.오히려 슈나벨은 자신이 날아오르는 길을 택했다.이카로스의 날개 같은 예술적 허영에 대한 대답은, 결국 자유를 갈망하는 독자나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유난히도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은, 필자 같은 부류에게 장 보비라는 멋진 친구를 남겨주고 말이다. 그렇다면 기왕지사 선물로 받은 멋진 새 친구의 보금자리를 곁에 마련해주지 않는다는 건 웬지 배신이며 무례한 삶의 공식일 것 같다.
지금까지 필자를 옭죄었던 그림자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새로 사귄 친구가 또아리를 틀고 들어앉게 만들려고 한다. 이제부터 사악한 짓거리를 일삼다가 퇴출된 그림자의 역할은 장 보비가 할 것이다. 필자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봐주는 것도 그의 몫이며, 필자의 흔적과 상실을 전부 책임지는 것도 물론 장 보비일 것이다. 또한 기왕지사 친구가 되었으니, 필자도 장 보비의 숨겨진 슬픔과 난감한 현실을 필자의 업보로 받아들이고, 그냥 그 속에서만 허락된 자유를 찾으리라. 함께 숨쉬며 한껏 자유로 자유로 날아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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