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林森의 招待詩 **
봄, 그리움
머얼리서 오는 봄 바라예다 이내 지붕위 잔설 글썽글썽 낙수되어 지는데, 하마
머얼리로 떠난 임 기둘리다 진즉 사무친 속내 주룩주룩 낙루되어 떨구네, 하냥
봄 오시면 오시려나 봄 오시듯 오실까나 뭉클뭉클 솟아나는 봄, 그리움
- 시(詩)의 창(窓) -
보통, 가을 추억은 유난스레 감성을 건드려 아련한 그리움에 몸살나게 만드는 요물이고, 봄 추억은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설레임에 들뜨게 만드는 귀물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그런 속설에 이미 세뇌된 뭇 사람들은 가을 추억만 그리움의 화신이라 여기면서, 이미 가을 기운 스미기 전부터 그리워할 준비하느라고 조급하다. 그렇지만 필자는 안 그렇다. 해마다 봄이 오면 나름 소중한 추억의 편린을 수집하느라고 여간 바쁜 게 아니다. 그리고는 그 추억들을 모아 모아서 깊은 마음창고에 숨겨놓고, 시간이 가도 변치 않는 그리움에 맹렬히 그리워하면서 살아간다.
늘상 느끼는 심상이라서 이젠 그냥 그럭저럭 견딜 만도 하리라 여기다가도 막상 봄이 오면, 이렇듯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솟구치는 그리움에 몸살을 앓으며, 일상의 어디 한 군데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엉절거린다. 참으로 야속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런 사단은 올 봄에도 어김없이 증명되고 있음이다. 안타깝게도, 한심스럽게도, 온 나라가 역사상 보도 듣도 못하던 악마의 마수에 걸려 허덕이는 이 때이거늘 봄이 무에 대수라고 이리 심하게 계절을 타는지, 나날이 더해지는 역마살의 유혹에 제자리 걸음 하며 팽이 돌 듯 좌불안석이다.
나라 꼴이 뒤죽박죽인 이런 형편에는, 생각할 줄 아는 성인이라면 알아서 처신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그래도 배울만큼 배운 터수인지라 그저 마음으로만 한껏 그리워하며, 가슴에서 치미는 그리움일랑은 속으로 하냥 곱씹으면서, 그렇게 하 시절 인내하리라는 다짐으로 곱손 옹송거려보는, 남 보기에는 면구스럽고 꼴 사나운 아침 단상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네 사는 모습이 불시에 비 오듯 슬픈 날이 있고, 바람 불듯 불안한 날도 있으며, 파도 치듯 어려운 날도 있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견디지 못할 일도 없고, 참지 못할 일도 없다. 다른 집은 다들 괜찮아 보이는데 나만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가 생각하지만, 조금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집집이 가슴 아픈 사연 없는 집이 없고, 가정마다 아픈 눈물 없는 가정은 없다. 그렇지만 웃으며 사는 것은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와 동행을 한다는 의미다. 어차피 누구나 홀로 살아갈 수는 없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과 어울리고 뒤섞여 함께 살아간다. ‘삼국지’의 주인공인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었다면 ‘칭기즈칸’에겐 ‘야율초재’가 있었다.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만 보고 인물을 썼던 칭기즈칸이 한낱 피정복민의 젊은 지식인에 불과했던 야율초재를 그토록 신임했던 이유는, 천문, 지리, 수학, 불교, 도교 할 것 없이 당대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한 그의 탁월한 식견 때문이었다. 하늘과 땅과 인간, 그리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꿰뚫어 봤던 야율초재!
그가 남긴 아주 유명한 명언이 하나 있다. ‘與一利不若除一害(여일리불약제일해) 生一事不若滅一事(생일사불약멸일사)’ 즉, ‘하나의 이익을 얻는 것이 하나의 해를 제거함만 못하고, 하나의 일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일을 없애는 것만 못하다.’라는 뜻이다. 오래 전 역사 속의 인물이 남긴 말이지만 오늘날에도 그 뜻은 일맥상통한다. 진리는 시대의 변화에도 늘 변함없이 일정하다. 깊은 깨달음은 간결하고, 큰 가르침은 시대를 관통하는 법이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다. 아무리 때가 묻어 있고 마음이 탁할지라도 마음 어느 한 켠, 아주 투명하게 맑은 곳이 숨겨져 있고, 칭찬은 그것을 찾아내는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한다. 혹시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방향이 다르다고 혹은, 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책하기 이전에 그의 장점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칭찬하자. 그것은 그의 마음을 자라게 하고 잠재 능력을 개발시키는 훌륭한 동기가 될 것이다.
어느 부부가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지런한 주인 남자는 손님이 오면 찾는 물건을 재빨리 담아 건넸다. 그런데 오는 손님마다 달걀이 너무 작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어떤 손님은 “저기 길 건너 집 달걀이 훨씬 큰 것 같군요.”라고 하더니 그 집으로 달걀을 사러 갈 정도였다. 그는 경쟁자인 길 건너 가게로 달려가 달걀을 살펴보았다. 언뜻 보아서는 자기 가게 달걀과 크기 차이가 없었다.
경쟁자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달걀 몇 개를 사 와서 비교해 보니 생각했던 대로 크기가 같았다. 주인은 길 건너 가게에 달걀을 사러 오는 손님들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러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는 부리나케 가게로 뛰어가 아내를 불렀다. 그는 아내에게 오늘부터 달걀을 팔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손님들의 불만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오히려 달걀이 커졌다며 좋아하는 손님도 있었다.
“저기 길 건너 가게에서 파는 달걀은 너무 작아요. 사람들에게 달걀을 살 때는 이곳으로 가라고 얘기해야겠군요.” 다음 날부터 그의 달걀은 불티나게 팔렸다. 아내는 깜짝 놀라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었다. 그는 아내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길 건너 집에서는 부인이 달걀을 팔고 있더군. 그 부인의 손은 가느다랗고 작아서 달걀을 집으면 더 커 보였지. 반면에 내 손은 두껍고 컸기 때문에 내가 달걀을 집으면 작게 보였던 거야.”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비롯된다.
피아노의 건반은 우리에게 반음(半音)의 의미를 가르친다. 반(半)은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동반을 의미한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 과 반(伴)의 여백에 있다. 절반의 비탄은 절반의 환희와 같은 것이며 절반의 패배는 절반의 승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환희와 비탄, 승리와 패배라는 대적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들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든 ‘따로 또 같이’일 때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 있다. 스스로 독립적이면서, 또한 독립적인 개체로서 서로를 인정하여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사실을 고백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향해 삶을 올바르게 이어나가라고 좋은 권면의 말을 곧잘 하고는 있지만, 정작 필자 자신의 삶에서 그 아름답고 향기 고운 삶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아서 민망하기는 하다.
오늘은 오늘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미래로 가는 길목이다. 그러므로 오늘이 아무리 고달프고 괴로운 일들로 발목을 잡는다 해도, 그 사슬에 매여 결코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된다.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지혜와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말이다. 오늘이 나를 외면하고 자꾸만 멀리 멀리 달아나려 해도 그 오늘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으로 가득한 하루의 소중한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훗날의 소망과 꿈을 그리워하는 봄의 그리움을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강원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림삼 관련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