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림삼의 초대시 **
- 숲 -
꽃 보다도 잎 아름다운 이 시절이라 연초록 신록 하루가 다르니 늑장부리던 창밖 아까시까지 안간 힘 새잎 미느라 제법 부산타
세월 막혀 내게 뵈진 않아도 먼 고향, 휑하던 그 숲도 산록 하냥 우거져 이제 더는 뉘게도 속살 안 보여줄 터이지만
눈 시린 순백색 자태 유난히 하얀꽃들 환하게 밝히고 있겠거니 그 숲 정녕 정녕코 그리웁고나
귀룽나무 팥배나무에 산사 산돌배나무, 아그배 야광나무 대롱대롱 하얀 송이들이거나, 작은 가지따라 다소곳 피어나는 고깔모양 꽃망울들 계곡 바위틈 매화말발도리꽃이거나,
가만 있자, 또 무엇 그 숲 지천으로 있었더라 ? 아무튼....
지금은 하얀꽃들 맵시일랑 하얗게 하얗게 자라나 순결한 그 숲 저 깊은 데서 하이얀 조화 역사 사부작이 피워내고 있으리라
- 시작노트 -
언젠가 봄을 다 살고 난 후 초여름의 문턱에서 적었던 시다. 보통 계절은 색으로 대변된다. 봄은 초록색이라 하고 여름은 파란색, 가을은 붉은색, 그리고 겨울은 하얀색 정도라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다. 본래 색에 대한 개념이 그렇다 하니 필자가 시비를 걸 수는 없다. 그렇다손쳐도 사실 봄을 초록색으로 단정 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오히려 여름이 초록에 가깝고 봄은 노란색으로 표현하는 편이 더 가깝다. 개나리꽃이나 산수유꽃, 유채꽃이 만발한 들판이나 산자락을 상상해보면 예외 없이 누리가 온통 샛노랄 뿐이다.
허기사 꽃마다 색깔이 다르고, 피어난 모양새가 다르니 갖가지 꽃 만발하는 봄을 한 가지 색으로 압축시키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시시때때로 피는 꽃 색깔이 다르니, 봄은 마치 변검을 공연하는 중국의 경극배우들처럼 변화무쌍하고, 보기에 화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중에는 예기치 않게 돌아앉아 하얀색으로 물드는 산야가 있으니 필자는 그걸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듬성듬성 무리 짓지 않은 척 하면서, 온 산을 하얗게 물들이는 이름 모를 들꽃들을 눈여겨 보다보면, 정말 말로는 다 표현 못할 봄의 신비하고 은은한 정취마저 느끼게 된다. 이것이 또한 잊지 못할 봄의 숨겨진 진면목이다. 문득 꽃을 주제로 하여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어떤 색이나 형태를 막론하고, 모든 꽃이란 꽃에는 다 날아드는 영원한 친구, 나비와 벌을 떠올려보게 된다.
물론 완전히 다는 아니다. 역사 속에 보면 나비 없는 꽃에 관한 비사도 더러 있기는 하다. 특히 ‘삼국유사’에 보면 ‘선덕여왕조’에 선덕여왕이 미리 깨달은 일 세 가지인 ‘지기삼사(知幾三事)’가 수록되어 있다. 여왕의 즉위년인 632년,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얀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향기가 없음을 의미하며 곧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일연’은 이 고사를 소개한 뒤, 당 태종이 신라에 세 여왕, 즉 ‘선덕, 진덕, 진성’이 있을 것으로 미리 짐작한 점도 함께 칭찬하고 있다. 아무튼 꽃에는 당연히 나비나 벌이 꼬이게 마련이고, 그래야 자연의 섭리대로 종족이 번창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특별한 경우의 꽃이라서 벌이나 나비가 따르지 않는 상황도 간혹 있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근본 논리를 뒤집는 실태가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는 데에 경악을 금할 길 없다. “꿀벌이 사라진다면 인류는 4년 내 멸망할 것이다.” 라고 한 천재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예언은 과연 들어맞는 것일까? 지구촌 곳곳에서 꿀벌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몇 해 전 미국 ‘농무부’가 발표한 통계치에 따르면, 한 해 겨울 동안 미국 꿀벌 군집의 31%가 줄었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사라진 꿀벌의 수는 80만 마리에 이른다. 21세기 들어선 이후 최대 감소폭이다. 유럽에서도 그 전 해에 22%의 꿀벌 군집이 없어졌다. 영국은 심각하게도 꿀벌 개체 수가 25년 사이에 절반으로 감소한 상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꿀벌은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주요 작물 중 71종의 ‘수분(꽃가루받이 : 수술의 꽃가루가 암술에 붙는 현상)작용’을 돕는다. 꽃 사이를 꿀벌이 부지런히 오가며 꽃가루를 옮겨주는 덕에 열매를 맺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억년 간 지구 생태계를 지켜온 꿀벌이 떼죽음을 당한다는 건 곧 식물의 번식이 멈춰져서 생태계 질서가 무너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옛날 마지막 예비군 훈련 때 벌에 쏘여 아팠던 기억 때문인지, 벌은 웬만해선 좋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나서는 예전만큼 벌이 밉지는 않다. 오히려 “더 늙기 전에 양봉이나 해볼까?” 라는 얄팍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쥐, 뱀, 모기와 같이 무조건 싫은 것들도 다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이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인간으로서의 중요한 미덕이라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조건 싫지 않을까 싶어지기까지 한다.
벌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습득해온 여러 기술(춤, 비행술, 페로몬을 통한 의사소통), 직접 만든 독특한 생산품(꿀, 밀랍, 로열젤리)과 아울러 벌집의 놀라운 사회적 구조로 볼 때, 벌은 어떤 면에서 인간과 완전히 다른 지능을 지니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충분히 탐구해볼 가치가 있다. 벌은 다른 생명체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독특한 존재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자연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그 자애로운 보살핌과 보호 속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과거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고, 우리라고 해서 나중에까지 지금처럼 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지금 우리는 약육강식을 바탕으로 한 파괴적인 경제와 사회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 이를 대체할 진정한 대안은 바로 자연의 보살핌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것이 사라져가는 벌을 살리는 첩경이 될 것이고, 나아가서는 자연을 되살리는 원천적인 대안이 될 첫걸음이다.
오늘은 생각지 않게 시의 창이 생물학 강의를 모방하여, 재미없는 교재처럼 이어졌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소홀히 여기고 있는 벌의 이상징후를 절대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듯 하여, 필자가 모처럼 작심하고 몇몇 근거들을 추스려 열거한 것이다. 인간의 삶은 자연에서 비롯된다. 자연의 구성원은 하나같이 소중하다. 소중한 개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입장에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생존을 이어가며 경쟁하는 것이 모든 섭리의 기초다. 기초가 튼튼하다면 그 뒤에 이어지는 과정은 자연히 튼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튼튼한 과정들이 촘촘히 엮여져서 역사를 이룬다. 어떤 역사를 막론하고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다. 승리와 패배, 번성과 쇠락, 지속과 단절 등은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마치 동면의 양 면처럼 가까이에 실존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느냐와 직결된다. 그것이 순리다. 순리로 이어지는 역사는 영원하다. 영원의 숨결은 자연 속에 살아있다. 자연을 보존하고 가꾸는 마음에서 영원을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가 빛난다. 자연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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