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森의 招待詩 -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

林森의 招待詩

림삼 | 기사입력 2025/10/18 [07:54]

林森의 招待詩 -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

林森의 招待詩

림삼 | 입력 : 2025/10/18 [07:54]

  © 림삼

 

** 림삼의 초대시 **

 

-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 -

 

만삭의 여인네였다

 

나는 그 배가 무서워

혈기껏 발길질 하고 그녀는

제 손으로 목을 졸라

멱줄 두개는 끊어져갔다

 

비석 하나 없는 그녀의 무덤 베고

난 항상 편지를 쓴다

 

살다가 살다가

주검이 백태처럼 혓바닥 잡아댕기면

난 용서를 기구하여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사랑으로 지핀 불을 보낸다

 

아직도 뜨거운 그녀의 염통 받쳐들고

얼마나 섧이 울었었던가!

 

푼수도 모르는 머리카락 잘라내어

종이 살 때 보태라고

선웃음 머금던,

 

글쟁이 닮아진 모양 해 좇아 넘어가고

고즈녁한 산 여울 으악새 비명 따라

난 편지에 대고

힘차게 오줌 갈긴다

 

- 시의 창 -

 

모든 시인들이 쓰는 시에는 일반 독자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깊은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있어졌던 일들을, 생각하는 사정들을, 사실적으로 쓰는 수필이거나, 서술로 설명하는 소설이라면 나름대로 어느 정도는 추측을 할 수도 있지만, 실상 이리 비틀고 저리 꼬아서 내면의 심상을 은유해놓는 시라면, 작심하고 감추려는 시인의 의도를 어지간해서는 알아차리기가 쉽질 않다. 허기사 그래서 시의 세계가 오묘한 건지도 모른다.

 

때로는 시를 지은 시인 자신도, 시일이 좀 경과되고 나면 본인이 무슨 생각으로 시를 지었는지 그 근원이 애매모호할 때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당시의 절절했던 심정이나 감성이 그대로 기억나는 시가 있다. 구절 하나 까지도 생생하게 머리 속에서 되살아나는 시라면, 아마도 그 시는 시인의 역작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비단 독자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거나 애송되지 못하더라도, 시인이 사랑하고 애착이 가는 시라면, 바로 그 시는 대표작인 것이다. 그런 시가 있다. 바로 필자의 이 시처럼.

 

이 시는 참 오래 전에 지은 시다. 그리고 정말 많은 사연과 애환이 녹아있는 시다. 물론 기왕지사 이미 지어진 시이거늘 개인 사정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느냐만, 그래도 그리 간단한 건 아니다. 적어도 이 시만큼은, 다른 몇 편의 시와 더불어 필자가 잊지 못할, 쉽사리 남에게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가슴 저린 사연을 내포한 고백시임에 틀림 없다. 매끄럽게 잘 지어낸 시는 아니다. 독자들에게 추천할만 한 시도 아니다. 그냥 필자가 마음으로 간직해야 할, 그리고 잊어서는 안될 어떤 시절의 회한을 고스란히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할 증거가 되는 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좋은 기억과 나쁜 경험을 동시에 교차시키면서, 숱한 사연들의 탑을 쌓아간다. 잊고 싶다고 해서 잊어지는 것도 아니고, 지우고 싶다 하여 묻어버릴 수도 없는 기억들이 정작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때로는 아픔이 힘이 되고, 상처가 연단이 되어 우리 삶의 보람으로 환생하기도 하며, 미래의 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재료가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1초 전도 과거이고, 1초 후도 미래다.” 라고 한 어느 성인의 말처럼 지극히 짧은 찰나의 현재들을 이어나가면서 우리의 삶은 무던히도 분주하게 사연을 만들어간다.

 

지금 현재의 우리는 어떤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걸까? 스스로 빚는 삶의 모양이 아픔은 아닐까? 슬픔은 아닐까? 돌이키지 못할 후회는 아닐까? 아니면 혹시 도무지 있어서는 안 될 파멸과 어둠의 형상을 지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때때로 필자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의 이야기가 무서울 때가 있다. 적어도 반성과 결단의 때가 지나면,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져 또 다른 도전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는 삶이 주어진다면 좋을 텐데, 그 여로조차 알 수 없는 미래가 때로는 많이도 두렵다.

 

옛날 한 젊은이가 스님이 되기 위해 노승을 찾아갔다. 노승은 젊은이에게 시험에 합격하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마침 솥을 새로 걸던 참이어서 젊은이에게 걸라고 했다. 젊은이는 행여 노승의 마음에 안 들면 시험에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서툰 솜씨나마 정성껏 솥을 걸었다.그런데 노승은 말했다. “이쪽이 기울었네, 다시 걸게.” 젊은이는 솥을 내리고 균형을 맞춘 다음 솥을 걸었다. 그러나 노승은 다시 말했다. “솥의 방향이 틀렸네, 다시 걸게.” 젊은이는 솥을 내리고 방향을 맞춘 다음 솥을 걸었다.

 

노승은 갖가지 이유로 솥을 다시 걸게 하였다. 무려 아홉 번을 트집 잡아 반복하게 했다. 노승이 젊은이에게 말했다. “계속 일을 반복하여 시키는데 자네는 화가 나지도 않나?” 그러자 젊은이가 대답했다. “세 번까지는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분명 무슨 뜻이 있을 거로 생각하니 오히려 기대되었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든 더 반복할 자신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세 번이면 화를 내고 가버리는데 자네는 아홉 번까지 참았네. 오늘부터 자네를 제자로 삼고 자네의 이름을 구정이라 부를 걸세.” 그 젊은이는 후에 구정 선사로 존경받는 스님이 되었다. 우리의 인생의 속도는 어떤가? 너무 빨리 달리면 그만큼 위험이 따르게 되어서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많아질 것이고, 너무 느리게 달리면 목표지점에 다다를 수 없게 될 것이다. 알맞은 속도로 달리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가슴 속에 작은 인내를 품고 참고 기다리며 알맞은 속도로 달려갈 때 인생의 참다운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멈추지 않는 이상,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고 공자께서도 말씀하셨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떤 모양으로 남에게 보여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느냐가 아니고, 어떤 자세로 인내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내면의 깨달음이다. 비록 지금은 보여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인내의 끝에는 열매가 필경 있기 마련이다.

 

호박벌은 몸길이가 평균 2.5cm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를 가졌다. 그런 호박벌은 꿀을 모으기 위해 하루에 약 200Km 이상 되는 먼 거리를 쉴 새 없이 날아다니는 신기한 곤충이다. 체구와 비교하면 천문학적 거리를 날아다니는 셈이다. 사실, 호박벌은 태생적으로 날 수 없는 신체구조로 되어 있다. 몸통은 크고 뚱뚱한 데 비해, 날개는 작고 가벼워서 날기는 커녕 떠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호박벌은 매일같이 꿀을 모으기 위해 비행을 한다.

 

어떻게 그 작고 뚱뚱한 몸으로 기적 같은 비행을 하는 걸까? 그리고 그 엄청난 거리를 날아다닐 수 있는 걸까? 호박벌은 자신이 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오로지 꿀을 모으겠다는 일념이 호박벌의 비행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목표는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거친 파도와 역경을 극복할 힘이 된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만약 목표 없이 일을 진행한다면 중도 포기는 당연한 결과이고, 기회가 와도 성공은 한낱 꿈에 불과할 수 있다.

 

목표 없는 삶에서 무슨 가치를 논할 수 있으며, 목적을 상실한 행로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예컨대 사람이 살아가는 여정은 목표를 뚜렷이 세워 그 목표점에 자신의 가치를 얹어 놓고, 주야로 돌아보며 부단히 사랑을 연결해가는 끊임 없는 노력이다. 비록 가슴에 슬픔과 아픔을 품고 있을지언정 속으로만 승화시키며,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사랑과 온유한 가치라면 되는 거다. 그렇게 살다보면 하늘이 정해진 운명이 소망으로 연결되는 행복의 내일이 열릴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살면 된다. 그런 신념으로 가면 된다. 그런 내용을 소중하게 갈무리하여 필자는 오늘도 편지를 쓴다.

 

 

  © 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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