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톨랜드의 6ㆍ25전쟁 1(존 톨랜드 지음, 김익희 옮김, 2010) / 차용국

이정현 | 기사입력 2020/06/21 [14:13]

존 톨랜드의 6ㆍ25전쟁 1(존 톨랜드 지음, 김익희 옮김, 2010) / 차용국

이정현 | 입력 : 2020/06/21 [14:13]

존 톨랜드의 625전쟁 1(존 톨랜드 지음, 김익희 옮김, 2010)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일본이 항복한 후, 투루먼 대통령은 소련과 미국이 각각 38도선 이북과 이남에서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자고 제안했습니다(16). 이것이 불행의 서막이었습니다. 표면상 아무런 악의도 없어 보이는 이 제안은 한국인들의 오랜 염원인 독립의 꿈을 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 민족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갈라놓았습니다(16). 남북 양측의 한국인들은 모두 격분했지만, 결정은 번복 돼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사실상 두 개의 한국이 생겨났습니다. 강대국 간의 무분별한 셈법이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미소를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 변했습니다. 이제 한국의 양 진영은 이데올로기의 첨병이 되었습니다. 19497, 투루먼 대통령은 성난 어조로 한국이 '아시아에서 우리의 완전한 성공을 좌우하는 이데올로기 전쟁터'라고 선언(17)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625전쟁을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투루먼도 공산진영의 소련과 중국이 공모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혹자는 미국이 남한을 부추켜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연구의 가치는 있을 수 있으나 여전히 믿을 만한 근거는 미흡할 뿐입니다.

 

625전쟁의 발발은 당시 북한 정권의 역학적 구도 문제와 이를 해결하고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기 위한 김일성의 야욕과 오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처음으로 남침 계획 승인을 요청한 것은 19493월 소련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스탈린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미군이 1949630일에 한국군의 훈련을 완결시킬 목적으로 미군 장병 약 500명으로 구성된 주한 미군사고문단(KMAG)을 남기고 한국을 떠나고, 19498월에 소련의 핵실험이 성공한 후, 19504월이 되어서야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김일성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남침에 집착했을까?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36세에 북한의 수반이 된 김일성은, 비록 항일 무장투쟁을 한 이력이 있고, 소련군 장교로 있으면서 전투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대대급 이상의 전투 경험은 없었습니다. 반면에 북한군에는 중국군과 합동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경험 많은 항일 무장투쟁 단체 장병들과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에 소속되어 다양한 전투경험이 풍부한 장병들이 많았습니다. 소련의 후광이 있긴 하지만, 김일성의 입지는 늘 불안했습니다. 자신의 지도력과 위상을 굳건하게 해줄 결정적인 돌파구가 긴요했습니다.

 

김일성이 보기에 남한의 국민은 가난했고, 정국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남한에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친북 세력도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북한의 병력은 남한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했습니다. 북한의 지상군은 총 15만 명이었으며, 그중 89,000명이 훈련 받은 전투병이었습니다(20). 북한군은 소련 군사고문으로부터 훈련을 받았고, 소련이 철군하면서 제공한 150대의 T-34 전차와 박격포, 곡사포, 자주포, 대전차포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남한에는 약 65,000명의 전투병이 있었는데,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M1소총, 카빈총, 박격포, 곡사포, 성능이 낮은 바주카포 등으로만 무장을 했습니다(20). 전차와 중형포도 없었고, 공군은 22대의 훈련기와 연락기뿐이었습니다. 트루먼과 그의 수석보좌관들은 한국군이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는 충분하나 북측을 선제공격하기에는 불충분한 수준의 전력만 갖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18).

 

1950624, 어둠에 잠긴 38도선에는 북한군이 보유한 소련제 122밀리 곡사포, 76밀리 평사포, 자주포가 이미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소련 군사고문들로부터 훈련을 받은 약 9만 명의 전투병들이 소련제 T-34 전차 150대와 함께 최종 공격위치로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25). 38도선 건너편에는 전력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한국군 4개 사단이 전선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나마 농촌 출신 병사들은 얼마 전에 농번기 일손을 돕기 위해 15일간의 휴가를 떠났습니다(25). 군 지휘부 공백도 컸습니다. 전선의 일부 지휘관들은 육군회관 개관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습니다. 국방부의 고위 장교 대부분도 파티에 참석했습니다(26). 이미 전쟁은 초읽기에 들어갔는데.

 

이 책은 바로 전쟁 발발 전야인 1950624일부터 1126일까지의 기록입니다. 물론 1127일부터 195396일까지의 다큐멘터리는 2권으로 이어집니다. 저자 존 톨랜드는 전쟁의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기록하고 재현하는 미국의 전쟁 다큐멘터리 작가입니다. 이 책은 영어 원제 ''In Mortal Combat : Korea, 1950~1953"의 번역서입니다. 625전쟁에 관한 국내의 책도 많은데, 이 책을 읽는 것은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살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파란 눈의 서양인이 본 625전쟁은 어떤 역사적 의미로 그려지는 것일까?

 

드디어 1950625일 새벽, 북한군은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북한군은 순식간에 38도선을 돌파했습니다. 북한의 수도에서는 남한 군대가 새벽에 38도선 전역에 걸쳐 기습공격을 해왔으며, 이에 따라 적을 격퇴하라는 명령이 인민군에 내려졌다는 내무성 성명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인민군이 적에 맞서 완강한 반격작전을 펼치고 있다(36).''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서울과 대전을 차례로 점령한 후,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손에 잡힐 듯한 완전한 승리는 번번이 저지되었습니다. 전투가 장기전이 되면서 병사들은 지쳐있었고, 유엔군의 공습으로 낙동강 전선을 이어주는 도로와 철도가 파괴되어 증원 병력과 물자의 조달이 불가능했습니다. 탄약과 전차와 수송차량을 움직일 유류도 동이 드러날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통해 유엔군이 915일에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마땅히 인천에 병력을 투입하여 해안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상륙 함대에 대한 저지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격렬한 논조의 명령문을 작성하여 예하부대에 하달했을 뿐입니다. ''모든 해방지구를 보호하고 방어하라! 피와 목숨을 바쳐 모든 산과 강을 수호하라(279)!'' 김일성은 유엔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조급했습니다. 그는 부하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91일에 낙동강방어선을 총공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워커 장군의 8군을 격파하고 전쟁을 끝냄으로써, 자신이 위대한 군사 지도자임을 세계에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302). 김일성은 오만하고 유치한 애송이였을 뿐입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중국은 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것인가에 민감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과 맥아더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국군을 즉각 북진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맥아더도 ''적이 항복하지 않는 한, 그리고 적이 항복할 때까지, 나는 한반도 전역을 우리의 군사작전지역으로 간주합니다(357).''라고 미국 국방장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또한 맥아더는 101, 북한군 총사령관에게 항복을 권고했습니다. 개전 초기에 무작정 낙관론에 사로잡혔던 스탈린은 서울이 탈환되자 전쟁에서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음흉한 스탈린은 ''김일성 동지는 망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중국의 동북부 지방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362).

 

고민은 중국의 몫이 되었습니다. 중국은 전쟁에 말려들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미군은 대만과 중국 동부해안에 진출해 있었고, 곧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대치해야만 하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해질 판이었습니다. 중국의 위협은 최고조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중국 동북부 지역은 중국 중공업의 80%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수호되어야 했습니다. 김일성이 만주로 피신한다면 중국의 국경선이 존중될 수 있을까? 마오쩌둥으로부터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지명된 펑더화이는 ''미국이 중국을 침략하려고 한다면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덤빌 것이다. 그 시기는 단지 호랑이가 얼마나 굶주렸느냐에 달려 있다(360).''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중국은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을 지키려는 신념도, 북한을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확산하려는 조치도 아니었습니다.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적인 조치였을 뿐입니다.

 

중국이 개입하자 전쟁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유엔 16개국과 남한은 북한과 중국에 맞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야만적인 싸움을 벌였습니다. 피아를 막론하고 400만 명이 사망했고, 그중 절반이 민간인이었습니다. 1953년에 정전협정이 마침내 체결되었지만, 전쟁을 촉발시킨 문제들 중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8). 전쟁은 영웅도 탄생시키고,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창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625전쟁은 1129일간 벌어진 아집과 증오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70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부도덕한 전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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