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약속(이수진 지음, 2021) / 차용국(서평 쓰는 시인)

차용국 | 기사입력 2021/01/16 [20:15]

바람의 약속(이수진 지음, 2021) / 차용국(서평 쓰는 시인)

차용국 | 입력 : 2021/01/16 [20:15]



바람의 약속(이수진 지음, 2021) / 차용국(서평 쓰는 시인)

  

 

신축년 새해 벽두에 폭설을 뚫고 날아온 이수진 시인의 신작 시집 <바람의 약속, 2021>. 이수진 시인만의 시심이 살아있는 시어가 설국의 강에서 빛나는 윤슬처럼 파닥파닥 튀고 있다. 한 음절 한 마디 허투루 지나칠 수 없도록 야무지게 다듬은 시어 풍부한 어장을 유영하며 누리는 호사는, 좋은 시 읽기에서만 만날 수 있는 벅찬 특권과 같은 것이리라.

 

사실 이수진 시인의 낯설고 신선한 시어 조탁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신호가 있었다. 제1시집 <그리움이라서, 2016>와 제2시집 <사찰이 시를 읊다, 2017>를 펼쳐보면 금세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1시집 <그리움이라서, >에서 보여주는 은유, 상징, 의인화 등과 같은 여러 시적 기재의 어울림에서 구현되는 참신한 묘사를 보여주었다. 재능과 노력이 체화되어 이룬 소중하고 단단한 시적 기반을 느낄 수 있다. 제2시집 <사찰이 시를 읊다, 2017>는 주제에 관한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사찰을 제목으로 시를 지어 한 권의 시집으로 펴내는 열정은 뼛속까지 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시조집 <어머니의 비녀, 2020>를 통해 한국의 전통적인 운율의 옷을 입혔다.

  

위와 같이 3권의 시집을 지으며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고 변화를 거듭하며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건설해 가는 이수진 시인의 열정 가득한 아름다운 시의 여정을 대략 살펴보았다. 신작 시집 <바람의 약속, 2021>에서 빛나고 있는 시어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연마한 이수진 시인의 메타포(metaphor)와 리듬(rhythem)이 어우러진 언술이라 해도 좋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기꺼이 낯선 시어를 낚아 올리는 수고가 완숙한 수준으로 이끌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시 같은 시란 어떤 시인가?

가슴에 던져 보는 물음표에 답안은 한 가지뿐

척박한 시 밭에 꽃씨를 뿌리듯 시어를 뿌리고

...... (중략) ......

흑백 영상에 어둔한 발음처럼 벙어리 입속에서

웅얼거리다 마는 언어가 아니라

무릎 탁 치는 전율이 한마디아저 자맥질하여

건져 올린 시어로 엉킨 타래가 술술 풀리듯

여백을 채우려고 펜을 들었던 긴 시간

 

쇠꼬챙이 갈고 갈면 바늘이 되듯이

바위를 뚫는 낙숫물처럼 거친 바람도

순수하게 피워낸 시어가 어둠을 사르고

 

(''시인의 말'' 일부)

이수진 시인의 신작 시집 <바람의 약속, 2021>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시인의 시 짓기는 '쇠꼬챙이 갈고 갈면 바늘이 되듯이/바위를 뚫는 낙숫물처럼' 시어를 사르는 일이다. 이 시인의 진솔한 고백에 가슴이 뭉클하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가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다. 언어가 있어야 사물도 있고, 현상을 분별할 수 있으며, 생각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언어는 문학인, 특히 시인의 평생의 업이다. 시는 말로 출발하여 말로 끝난다. 시를 읽는 기쁨은 시향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은 물론, 눈에 확 띄는 시어를 낚는 재미도 한 몫을 한다. 참신한 시어가 전하는 전율 같은 것. 흔히 '낯설게 하기'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표현 기교는 시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좋은 자질이다. 이런 치열한 수고로움이 있었기에, 이 시집을 읽는 독자는 이 시인이 안내하는 감동의 나라로 가는 길에 동참하여, 서정을 공유하고 싶어 할 것이다. 시집 <바람의 약속>을 따라 여행을 떠나보자.

 

파르르 떨리는 전등불

하나 둘 빛을 잃어갈 때

서둘러 문 나서는 하루가 묵직하다

 

도심 빌딩 외벽에 기댄

고달픔이 끼니로 매달리고

오늘도 바람에 맞서는 거미

 

유일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허공의 외줄

허기를 채우기 위해 기다리는 눈빛

출렁거리는 반응에 달려 나간 곡예사

칭칭 먹이를 감는 시간이다

 

회색벽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오늘과 내일이 오르내린다

 

출렁대는 허공을 움켜쥐고

수직으로 낙하한다.

 

(''스파이더맨'' 전문)

 

'스파이더맨' 하면 먼저 영화가 떠오를 듯하다. 악인과 싸우는 정의의 화신, 시민을 구하는 영웅, 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주인공 말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그런 주인공을 상상하는 독자는 아마 없을 듯하다. 이 시의 주인공은 매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도시적 삶의 애환을 스파이더맨에 비유하여 그려낸 이 시의 화자는 '도심 빌딩 외벽에 기댄' 소시민이다. 외줄을 타고 고층빌딩의 유리창과 외벽을 청소하는 분들만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직장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문 나서는' 도시인의 표상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불경에서는 인생을 '흑백이서(黑白二鼠)'란 이야기로 설파한다. 광폭한 코끼리에 쫓겨 우물에 숨은 인간은 칡넝쿨에 의지해 버티는데, 바닥을 보니 독룡이 입을 벌리고 잡아먹으려 하고, 사방의 벽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설상가상으로 검은 쥐와 흰 쥐가 칡넝쿨을 갉아 먹고 있는데, 칡넝쿨 위에서 떨어지는 다섯 방울의 벌꿀에 현혹되어 순간을 살아가는 인생의 허무와 욕망에 도취된 인간의 교만을 경계 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다. 우리는 이렇게 도시라는 회색의 공간에서 애를 쓰며 순간을 살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그곳에도 희망과 사랑이 없을 리가 없다. 이수진 시인은 이런 도시의 삶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가 기억하고 그려내는 도시의 삶의 이야기는 죽을 듯이 몸부림치며 찰나의 욕망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인간군상이 아니라 인간애와 추억이 어우러진 따뜻한 삶이다.

 

여기가 어디일까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이 모퉁이 돌아서면 걸어왔던 길이 보일까

아니, 갈 길마저 잊은 건 아닐까

 

추억의 뒤안길을 거닐며 생각한다

지난 시간 오롯이 사랑했을까

온 마음으로 품어 안았을까

낡은 흔적 펼쳐놓은

눈빛에 기대어 나에게 묻는다

 

아린 언어만 한 진 한 자 써 내려가며

붙잡고 싶었던

그 순간에 사선만 그어댄다

 

매달리고 싶었던 그날도

오늘처럼 붉게 타오르고

겨울 앞둔 삼청동 그 골목에 뿌렸던

눈물의 의미도 곱씹어본다

 

아쉬움도, 미련도

가슴 깊이 차곡차곡 쌓아둔

지나간 골목

그리움만 하얗게 덧입히며.

 

(''중년 여인의 가을'' 전문)

 

이 시는 중년 여인이 지난날을 반추하며, 차분하게 삶을 성찰하는 시향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년 여인은 화자인 시인으로 보아도 좋고, 시대와 인생의 여러 굴곡을 경험하며 살아온 여성의 보편적 표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이 시를 인용하는 것은 삶의 잔잔한 어조에 어울리는 사유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도 하지만, 이번에 펴낸 신작 시집 <바람의 약속, 2021>에서 두드러지게 많이 발견되는 시어의 특징에 대하여 말하고자 함이다. 한 시인의 시집을 출간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각 시집마다 눈에 띄는 시어가 있고, 그 시어와 어울린 시향의 변화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는 시인이 지향하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감지할 수 있는 신호라 할 수 있다. 이수진 시인이 신작 시집 <바람의 약속, 2021>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는 시어는 기억과 추억이다. 시 한 편을 더 보자.

 

삼청동 회색빛 기억은 어깨를 짓누르고

골목을 끌고 온다

 

허름한 기왓장이 햇살을 달구어

그날의 냄새를 피워낸다

 

짓무른 칠월이 지난날의 흔적으로

탁자를 괴고 앉아 흥얼거리고

 

떠난 지 오래 된 그의 체취는

아직 손끝에 남아있다

 

함께 바라보던 여름은 그대로인데

지난 계절의 길목

코스모스 흔들림에 이별을 묻어놓고

 

또 이렇게 한 계절이

나를 외면하며 비껴간다.

 

(''향기로운, 그리고 쓸쓸한'' 전문)

 

이 시의 사유도 기억에서 시작한다. 기억이란 것이 다 좋을 리만은 없을 듯하다. '삼청동 회색빛 기억'도 마찬가지다. 삼청동 골목길에서 끌고 온 기억은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부침일 수도 있고, 이별의 정한일 수도 있고, 그곳에 매몰되어 숨어버린 나의 '자아'로 보아도 좋다. 시어는 사물과 사유의 1:1의 관계일 수는 없다. 1:다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시인이 지향하는 언술이며 시만의 독창적인 매력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그'는 추억의 연인일 수도 있고, 삶의 저편에 숨어있는 혹은 삶의 부침 속에서 억눌려있던 나의 '자아'의 발견일 수도 있는 이유이다. 그래서 이 시가 비록 '또 이렇게 한 계절이/나를 외면하며 비껴간다'로 마무리 되지만 이 말이 쓸쓸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자아를 채우겠다는 암시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자아를 불러내 정말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숨은 의지의 역설적 언술로 느껴진다. 시어란 이렇게 알 듯 모를 듯하게 행간에 숨어있으면서 뜻을 풍성하게 확장해주는 문학적인 언어이다.

 

울컥거리는 무언가는

하얗게 일어나는 기억이 잡아끄는

약속일 거다

 

그 언젠가 어느 길목에서

저만치 멀어져 간

강아지풀을 향수로 풀어헤친

내 머리를 어루만지는 바람도

어느 날의 약속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을 타고

휘어진 시간을 휘휘 저어 가면

가슴에 남겨진 흔적도

바람의 약속이었다

 

오늘도 추억을 기다리며 서성대고 있다

어떤 약속에 얽매인 채

 

(''바람의 약속'' 전문)

 

어떤 약속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약속이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해 두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꼭 집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먼저 그것은 '기억이 잡아끄는 약속(1연)'이라고 언급한다. 기억이란 사물의 형상에 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는 정신 기능을 말한다. 결국, 약속은 오래전에 맺은 기억 속에 내장되어 있는 그 무엇인 셈이다. 2연에서는 '강아지풀을 향수로 풀어헤친/내 머리를 어루만지는 바람' 같은 약속이라고 하다. 강아지풀은 '가라지'라고 부르는 한해살이풀이다. 밭과 들녘에 흔히 자라는 풀로 꽃말은 '동심'이다. 결국, 약속은 유년 시절의 동심에서부터 싹튼 그 무엇이다. 3연에서는 그 약속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을 타고/휘어진 시간을 휘휘 저어 가면/가슴에 남겨진 흔적'이라고 고백한다. 결국, 유년의 약속이 지난한 시간의 벽을 넘어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오늘도 추억을 기다리며 서성대고 있다/어떤 약속에 얽매인 채(4연)'로 시를 맺는다. 결국, 약속은 추억 속에 내장되어 있으며, 그것을 불러내어 오래된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어떤 다짐일까? 시문학의 세계를 펼치겠다는 이수진 시인다운 열정일 수도 있고, 독자마다 가슴속에 간직한 간절한 소망일 수도 있겠다. 독자의 몫이다.

 

지금까지 이수진 시인의 신작 시집 <바람의 약속, 2021>을 통해 이 시인의 시적 언술과 시관을 대략 살펴보았다. 에즈라 파운드는 '시란 최대한의 의미를 지닌 언어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극단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이처럼 시어란 의미와 정서가 조화롭게 함축되어 녹아있는 말이라 할 것이다. 결국 위대한 시 짓기란 있는 시어를 거저줍거나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언어를 조탁하는 일이라 하겠다. 이수진 시인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신작 시집 <바람의 약속, 2021>에서.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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