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바람이 유혹하는 저 산 너머에 썰매 타고 오는 북풍이 닿기 전에 단풍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여행을 가자
눈 밖에 난 녹음이 갈바람에 굴복하고 헛바람 든 시인이 나들이옷으로 갈아입는 단풍이 꿈틀대는 거기서 산책을 하자
식욕 잃은 단풍잎이 뱃살을 빼고 갈바람의 회유에 매정하게 인연을 끊는 유혹이 넘쳐 나는 그곳으로 길을 나서자
바람잡이의 허상에 싫증을 내고 떠돌다 지쳐 키 작은 단풍 아래 머물면
더 멀리 날기를 꿈꾸는 그곳에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자
- 갈바람의 회유 -
65. 회유
연수는 아직도 잔뜩 불만 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이상일 전무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어가려다 주문한 차가 나왔다는 진동벨 소리를 듣고는 카운터로 가 차를 들고 와서, 이전무와 자신의 자리에 놓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제가 제일 의문이 드는 건 협력업체로부터 받은 그 많은 거액의 리베이트 자금이나 횡령한 돈을 전무님께서 혼자 독식해서 사익을 취한 건지, 아니면 전무님은 그냥 중간에서 시키는 대로 하시고 돈은 다른 사람이 챙겨간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이전무는 아무런 대꾸 없이 침묵하며 연수를 마치 노려보기라도 하는 듯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시면 이 부분은 전무님이 혼자 하시고, 혼자 사익을 취한 것으로 이해해도 됩니까?"
연수가 이전무를 압박하며 다시 대답을 유도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난 모르는 일이라고요."
이전무가 짜증을 부리듯 단호한 목소리로 연수의 말을 부정하였지만, 일단 그의 호응을 유도한 것은 성공이었다
"그렇게 부정하셔도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미 여러 사람으로부터의 진술이 있어서 전무님의 리베이트 관련 의혹은 확정적인 것으로,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 얘기는 전무님께서 혼자 다 뒤집어쓰고 가느냐, 아니면 단순한 심부름꾼 내지는 조력자에 불과하냐 하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전무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은 중요한 것이, 횡령이나 배임은 형사사건으로서 회사에서 경찰이나 검찰에 고발하면 형사책임을 고스란히 전무님께서 다 짊어져야 하는 건데, 전무님의 죄가 그만큼 더 무거워질 수 있다는 거니까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니,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이전무가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협박하는 게 아니고, 판단은 전무님께서 하시는 거겠지만 저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무님께 설명하는 겁니다."
연수가 차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응대하자, 이전무도 주변을 의식했는지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좋아요. 그건 그렇다 치고, 장상무가 이러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아무리 비공식적으로 날 만나러 왔다고 하지만, 휴일날 쉬는 사람을 불러내서 보자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인 상해라고 하지만, 그래도 외국인데 주말에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을 날아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장상무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네요."
"맞습니다. 저도 이런 제가 이해가 안 되지만,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최종보고서를 최고경영층에 보고드리기 전에 이전무님을 뵙고 상황을 말씀드리고, 좀 더 정확한 사실과 진실을 파악해서 보고서에 담고 싶은 것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전무님을 찾아뵙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저도 절실한 마음이라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전무님이 잘못하신 거는 잘못하신 거고 지금 현 상황에서 전무님께서 하실 수 있는 한,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아니, 나를 보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면서 나한테 무엇을 도와달라는 거요?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장상무가 나를 도와주어야 할 것 같은데..."
이전무가 처음보다는 조금씩 말 수를 늘리며 연수와의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저는 이전무님께서 저지른 비위행위가 다 이전무님 자신을 위해서 그랬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고 이전무님도 그렇고, 지금은 좀 더 솔직해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솔직해져야 한다니요?"
"아시지 않습니까? 전무님이 모시고 있는 그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다 그분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을... 문제는 이전무님 자신입니다. 전무님이 입을 꼭 다문다고 해서, 이 일이 조용히 해결되고 그냥 넘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지난주에 전무님이 주관해서 전무님이 믿을만한 사람들과 협력업체 대표 몇 명을 모아 예청에서 대책회의를 하셨었지요?"
이전무가 흠칫하더니 연수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 저희한테 제보를 해왔습니다. 이미 이전무님 주위의 사람 중에서도 저희 쪽에 협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지요.
다시 말해 전무님의 비위행위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증거와 증언이 확보되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그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이미 자기들 살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입을 다물고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애국지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비위행위고 불법행위고 다 비난받을 행동이지 않습니까?
지금은 중국사업본부에서 제일 막강한 힘을 가진 실세이고 그 실세를 가진 사람에 의해 자신들의 출세 여부가 결정될 것처럼 보이니까, 그 사람 밑에 모여들고 협조하고, 충성을 맹세한다고 말은 하겠지만, 언젠가는 그런 것들이 명분도 없고 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연수의 말을 듣고 이전무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고 연수는 판단했다
"저는 전무님께도 기회를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건 제 진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무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제가 왜 주말에 여기까지 와서 전무님을 만나고 있겠습니까?
그냥 현재 작성된 최종보고서 내용 그대로 보고드리고 그에 따른 최고경영층의 의견을 받아서 그대로 집행만 하면 저도 편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진실이 묻히게 되고 모든 책임은 이전무님 본인이 다 뒤집어쓸 수도 있겠지요.
이전무님도 왕부회장에게 토사구팽을 당했던 성도에 있는 정호일 사장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분도 제가 만나봤는데, 그분 역시도 그간의 일을 무척 후회하면서 양심선언을 하셨습니다. 이전무님도 정호일 사장처럼 그렇게 토사구팽 신세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연수의 설득이 이어지자 이전무는 조용히 찻잔을 바라보며 침묵에 빠졌다
註 : 본 시소설은 가상의 공간과 인물을 소재로 한 픽션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강원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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