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 짓는 이야기

아름다운 우리말로 빚어내는 조각-푸른숲 시골빛 삶노래(23)

최종규 우리말 지킴이 | 기사입력 2014/11/28 [19:16]

손수 짓는 이야기

아름다운 우리말로 빚어내는 조각-푸른숲 시골빛 삶노래(23)

최종규 우리말 지킴이 | 입력 : 2014/11/28 [19:16]


손수 지은 나락을 손수 거두어 갈무리한 뒤, 손수 빻아서 손수 장작을 패고 손수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손수 솥에 끓여서 손수 밥상에 올리면, 온누리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 태어납니다. 이웃한테서 얻은 열매나 푸성귀도 맛나지만, 우리 보금자리에서 자라는 열매나 푸성귀를 그때그때 따서 먹으면 가장 맛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먼먼 옛날부터 얼마 앞서까지, 이 나라 거의 모든 사람들은 손수 흙을 일구어 손수 숲을 이루었고, 손수 지은 보금자리에서 손수 가꾸는 살림으로 가장 아름다우면서 즐겁고 사랑스러운 삶을 누렸습니다.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새마을운동이 한창 퍼져 시골에 농약과 비료가 마구 들어오기 앞서까지는, 시골집 풀지붕을 슬레트(석면)로 갈아치우는 일이 벌어지기 앞서까지는, 시골에 전기가 들어오기 앞서까지는, 시골에 텔레비전과 신문이 들어오기 앞서까지는, 참말 한국에서도 손수 짓는 삶으로 손수 가꾸는 보금자리가 아주 많았어요. 이무렵까지 한국사람도 ‘돈을 버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짓는 삶’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시골에서도 ‘돈을 버는 삶’입니다. 돈이 될 만한 것을 논밭에 심습니다. 돈이 될 만하도록 기계를 부리고 농약과 비료를 씁니다. 돈이 될 만하지 않기에, 들과 고샅과 논둑과 밭자락마다 돋는 수많은 풀(약초)을 지심으로 여겨 농약으로 죽이거나 기계로 석석 베거나 삽차를 불러 뒤엎습니다.
 
‘돈을 버는 삶’이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돈을 벌어 돈을 쓰는 삶’이 된다면, ‘돈만 생각하고 돈에만 얽매이는 굴레’가 된다면 아름다운 삶하고 멀어지지 싶어요. 우리가 밥을 먹는 까닭이라면, 우리가 아침마다 새로 일어나서 일하는 까닭이라면, 우리가 아이를 낳아 따사로이 돌보는 까닭이라면 ‘돈을 버는 삶’ 때문은 아니라고 느껴요. 우리는 저마다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삶’을 바라기에 온갖 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우리 보금자리를 일굽니다.
 
충남 서천 시골마을에서 나무를 만지는 삶을 노래하는 김소연 님이 쓴 《수작사계, 자급자족의 즐거움》(모요사 펴냄,2014)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에서도 드러나지만, 이 책은 ‘자급자족’을 이야기합니다. 손수 짓고 손수 누리는 즐거움을 이야기해요. 손수 가꾸어 손수 나누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흙 속에 씨앗을 넣어두면 저절로 싹이 트고 하룻밤 내린 비에 몰라보게 자라나는 생명력이 놀라웠고 깔아놓은 볏짚 틈바구니와 잎사귀에 붙어 먹이를 찾고 짝짓기를 하며 한철을 보내는 곤충들의 생활이 신기했다. 나는 땅을 좋아하게 되었고 꽃과 채소를 가꾸는 일에서 재미를 발견했다(44쪽).”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그립니다. 시골에서 살면 누구나 이러한 하루를 누립니다. 흙과 풀과 벌레와 나무와 들과 숲과 하늘과 햇볕 사이에서 즐겁게 웃습니다.
 
도시에서는 어떠할까요. 도시에서도 텃밭을 일구거나 마당을 보듬거나 뜰을 꾸민다면, 이 같은 이야기를 누릴 만하리라 생각해요. 아파트에서나 연립주택에서 사느라 흙을 밟을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땅바닥하고 붕 뜬 데에서 지내야 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누리지 못하면서, 꿈조차 못 꾸리라 느껴요.
 
아이들은 어떠할까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흙을 밟거나 만질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흙운동장을 달리면서, 흙바닥에 돌멩이로 금을 그리면서 놀 수 있을까요. 학교 운동장을 흙이 아닌 아스콘이나 인조잔디로 바꾸지는 않나요? 운동장 귀퉁이를 주차장으로 바꾸어 어른들 자가용을 잔뜩 세우지는 않나요?
 
요새는 학교에서 ‘학교 텃밭’을 아이들과 함께 일구는 어른이 차츰 늘어납니다. 도시 아이들이 풀과 흙을 하나도 모르는 채 자라면, 마음이 시드는 줄 깨닫기 때문입니다. 도시 아이들이 햇볕을 쬐지 못하거나 바람을 마시지 못하면, 참말 마음이 시들면서 사랑이 싹트기 어려운 줄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수작사계》에서도 이 대목을 찬찬히 짚습니다. “바느질할 때 내 자리는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 탁자 앞이었다. 흙벽돌에 자연 그대로의 황토를 발라 내부마감을 한 산너울 마을의 집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한낮에도 약간 어둑했다. 나는 그 아늑한 어둠을 좋아했다(9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해가 뜨기에 밤이 지나갑니다. 해가 뜨면서 새벽이 밝습니다. 해가 뜨면서 들과 숲에서 풀과 나무가 깨어납니다. 해가 뜨면서 풀벌레와 숲짐승이 기지개를 켜고, 사람들도 비로소 기운을 차립니다. 한겨울에도 따사롭게 비추는 해입니다. 빙글빙글 도는 지구를 해가 골고루 비추면서 골골샅샅 포근한 기운이 퍼집니다. 알맞게 낮과 밤이 흐르면서 지구별 어느 곳이나 즐거운 삶이 깨어나고 아름다운 사랑이 피어납니다.
 
밥 한 그릇에 햇볕 한 줌 서립니다. 김치 한 점에 햇볕 두 줌 깃듭니다. 나물 한 접시에 햇볕 석 점 스밉니다. 된장국에 햇볕 넉 점 감돕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밥에는 햇볕이 흐릅니다. 능금에도, 귤에도, 수박에도, 딸기에도, 그야말로 햇볕이 흘러요. 비닐집에서 키워서 얻는 열매나 남새가 아닌, 햇볕이 키우는 열매나 남새입니다. 수도물을 주어야 자라는 열매나 남새가 아닌, 빗물을 먹으면서 무럭무럭 크는 열매나 남새입니다.
 
우리도 풀처럼, 나무처럼, 꽃처럼,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온몸으로 맞아들일 적에 튼튼하면서 싱그럽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예부터 물 맑고 바람 싱그러운 시골로 보냈어요. 처음에는 맑은 물과 바람만 누리면서 기운을 북돋우고, 천천히 기운이 붙으면 조금씩 흙을 만지도록 이끌어 몸을 움직이도록 합니다. 시골에서 기운을 차리는 ‘아픈 사람’은 손수 땀을 흘리면서 흙을 일구면서 온몸이 맑게 깨어납니다. 온몸이 맑게 깨어나기에 온마음이 사랑으로 그득그득 넘칩니다.
 
문학을 하는 어른도 도시에서만 글을 쓰지 말고 시골에서 텃밭을 호미로 쪼면서 글을 쓰면 사뭇 다르리라 느껴요. 사진을 찍거나 예술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어른도 도시에서 창작에만 바쁘지 말고, 손수 괭이를 잡고 삽을 쥐면서 흙을 갈고 나무를 심을 수 있으면 모든 문화와 예술이 새롭게 거듭나리라 느껴요.
 
“가구는 숲에서 시작되므로 그 안에 반드시 숲의 흔적을 담고 있다(318쪽).”고 합니다. 맞습니다. 옷장도 책상도 나무로 짰으면, 이 옷장과 책상은 나무이며, 나무는 바로 숲에서 왔어요. 우리가 읽는 책을 생각해 봅니다. 책은 종이로 엮는데, 종이는 나무에서 왔습니다. 나무가 없으면 종이가 없고, 종이가 없으면 책이 없어요. 다시 말하자면, 숲이 있어 나무를 얻을 때라야 책이 태어납니다. 숲이 아름다운 시골이 넓게 드리워야 도시도 비로소 발돋움합니다. 우리가 즐겁게 삶을 짓자면, 아파트에 살더라도 시골숲이 아름답게 잇도록 마음을 기울이고 힘을 보탤 노릇입니다.

글쓴이 최종규 :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를 전남 고흥에서 꾸린다.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살려쓰기》, 《사진책과 함께 살기》 같은 책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 후원 은행계좌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최종규 우리말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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