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올바른 이해와 해석 (1부)

광개토호태왕비 개요와 기존 연구의 문제

박정학 (사)한배달 이사장 | 기사입력 2016/03/16 [19:31]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올바른 이해와 해석 (1부)

광개토호태왕비 개요와 기존 연구의 문제

박정학 (사)한배달 이사장 | 입력 : 2016/03/16 [19:31]


호태왕 비문의 바른 이해와 해석

목   차
1. 머리말
2. 호태왕비 개요 및 연구 상의 문제
3. 호태왕비문연구회의 활동결과 요약
- 찾아진 원문
- 바른 해석을 위한 노력
4. 왜 관련 기사의 새로운 해석
5. 마무리

1. 머리말

고구리 19대 임금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훈적을 기술하고 있는 중국 집안현 소재의 거대한 석비는 현재 우리나라 고대사 기록의 가장 오래된 공식 근거로 인정되고 있는 『삼국사』보다 730여년 앞선 기록이고, 돌에 새겨져 있어 변조의 가능성이 작으므로 우리 민족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인데도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해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비문이 1880년경 재발견되어 1889년에 일본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수많은 탁본들이 나돌고 있는데 비에 새겨진 글자 총 1,802자 중 2,60여자를 읽을 수 없고, 읽을 수 있는 글자도 학자마다 그 판독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일본과 중국인들에 의한 비문 변조 내지 훼손에 대한 주장도 많이 나와 있으나 최종 결론은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사료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비문의 원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한ㆍ중ㆍ일 삼국 학자들 가운데 원문을 찾아 발표한 학자는 매우 제한적이다. 처음으로 탁본을 하고 이를 연구하여 1903년 석문을 내놓은 만주인 영희 조봉(榮禧 莜峰)의 석문에는 결자가 15자밖에 되지 않으나 일본의 회유와 압력 후에 나온 것이므로 약간의 변질가능성 때문에 100% 믿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원문을 찾아놓은 것은 김택영-조소앙-김덕중으로 이어지는 계보와 이덕수-이유립으로 이어진 계보밖에 없는데 결자 부분의 복원에서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일본인들의 변조 가능성에 대한 시각의 차이 때문이다.
 
다음에는 바른 해석을 해내어야 한다. 이 비문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것이 일본이었고, 이를 만주침공의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 왜곡 해석’을 내놓았었는데 아직도 그것을 완전히 탈피한 해석이 나오지 못한 안타까운 실정이다. 당시의 고구려 서글(漢文)이 그 어법에서 중국의 한문과 다르고, 고문이므로 고한어(古漢語)로 해석해야 하지만 고한어를 잘 몰라 현재의 서글 해석법으로 해석하려니 어렵게 된다.
 
그래서 사)한배달과 국사찾기협의회에서 2014년 5월 13일 분야별 전문지식을 가진 분들로서 ‘호태왕비문연구회’를 만들어 1년 반 동안 1차적 원문을 찾고, 1차적 해석도 거의 완성단계에 와 있는데, 해석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왜곡한 왜(倭)관련 부분의 해석을 바로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아 오늘 이 부분만을 발표하고자 한다.

▲ 호태왕 비에 새견진 비문에서 횟물이 흘러내리는 모습     © 편집부


2. 호태왕비 개요 및 연구 상의 문제

1) 호태왕비 개요
고구리 19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사망(412)후 2년 후 그 아들인 장수왕 3년인 414년, 당시의 수도에 세운 아버지의 훈적비로서,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으며, 높이 6.34m, 각 면의 너비 1.3~2m에 이르는 동양은 물론 세계에서도 가장 큰 석비다. 4면에 대략 14~15㎝ 정사각형의 음각(5㎜) 글자 총 1802자가 새겨져 있다.

새겨진 글의 내용을 보면 1면 1행부터 6행까지는 고구려 건국으로부터 광개토태왕의 사망까지의 역사, 1면7행부터 3면 8행15줄까지는 백제, 비려, 왜, 동부여, 후연 등을 정벌한 호태왕의 공훈, 3면 8행16줄부터 4면 9행 끝까지는 태왕 묘와 조상 묘의 수묘 관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가 세워지고 10여년이 지난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월이 흐르면서 관리가 다소 소홀해졌으며, 청(淸)나라가 간도지역을 만주족(예맥, 숙신, 동호족 등)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제도(封禁制度=居住禁止조치)를 시행하여 200년 동안이나 출입을 금지시켰다가 봉금제도가 해제되어 이주가 시작된 1880년 전후 이 비가 재발견되었다.    

만주 침공을 위한 탐사요원으로 만주에 파견되었던 日本 포병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이 비문을 알게 되어 1883년 그 탁본을 참모본부에 전달하였고, 참모본부에서는 학자들로 팀을 구성해 비밀리에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여 대륙 침공의 발판이 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할 의도로 탁본에 손을 대어 일부 글자를 자기들의 목적 달성에 유리한 글자로 조작한 소위 일탁 쌍구가묵본(日拓 雙鉤加墨本)이 만들어진다.

1889년 ⌜임나일본부⌟설 관련 내용의 왜곡된 해석이 포함된 홍보물과 함께 ⌜고구리고비고(高句麗古碑考)⌟라는 제목으로 『회여록』(會餘錄 : 日本亞細亞協會 기관지) 제5집에 게재하여 일반인을 포함한 국제사회에 대대적 공개홍보를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903년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에 의해 홍문관(弘文館)에 전달되어 그 진실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1907년에 발행한 『증보문헌비고』에 게재하는 실수를 범했으며 그 후 일본 여행자들에 의해 탁본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 원석 탁본과 쌍구가묵본의 비교.     ©편집부


2) 기존 연구의 문제점    
이형구에 의하면, ‘1984년까지 광개토호태왕비문에 대한 우리나라 학자의 논문은 50여 편에 불과한 데 비해 일본인의 논문이나 논저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 책 부록에 실린 연구 목록을 보면, 총 335개 연구 중 우리 학자들의 연구는 매우 빈약할 뿐 아니라 대부분 1943년 최남선 이후의 실적으로서 ‘일본인이 이 비를 변조했다는 것을 지적하거나 현 탁본을 가지고 해석하는 데서의 오류 등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이후에 상당한 추가 연구가 나왔으나 실적을 종합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연구 논문을 남긴 나라는 일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이고, 그 다음이 훈적비가 서 있는 중국이며, 그 주인인 우리나라와 북한은 오히려 이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연구가 적을 뿐 아니라 훈적비의 주인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주체적인 연구 부분이 빠져 있다.


특히 제도권에서는 아직도 일본의 변조 사실에 대한 결론도 도출하지 않았고, 변조여부와 관련 없이 원문, 최소한 재발견 당시의 판독되었던 문장으로라도 복원하려는 연구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찾아놓은 문장에 대해서도 일본의 의도적 왜곡을 깰 수 있을 정도의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원본 기사 보기: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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