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의 장용희 작가  © 강원경제신문

최실마리

 

오늘도 퇴근 후 자주 들리는 커피숍에 들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였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한 겹더 붉어진 하늘을 바라보다가8시 반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일어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마법을 부리면 하루를 재충전하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버스 안에 들어서면 자주 앉던 자리는 신기하게도 비어져 있었다. 문을 개폐하는 옆자리이다.의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고생했어. 여기에 앉아.’라고 따뜻하게 말을 건네준다. 버스에 앉으면 창문을 살짝 열어 푸른 공기의 물결을 맞는다.

차가 덜컹거릴 때면공기 파도들이 덮쳐오지만 태극기 휘날리듯이 살짝 볼살을 꼬집어 볼 뿐 별다른 공격을 하지 않았다.

스르르 잠이 들면 일상 속에서 피어난 꿈의 조각들을 마음에 담아, 날개를 활짝 펼쳐 환상의 축제를 즐긴다.

커피를 마신 덕분에 곧잘 일어나 잘 내리기도 하였지만 오늘 바이어 미팅이 있어서 긴장이 풀어졌는지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치고 깜빡 잠이 들었다.

푸른 숲이 서서히 나타나며 초록나비가 되어 힘차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는데 가까운 숲에서 물컹 물컹해 보이는애벌레 한 마리가 꾸물꾸물 거리며 힘들게 잎 위에 기어 다니고있었다.

애벌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날갯짓을 하여 땀을 식혀주었다.
해가 뉘엿뉘엿지는 저녁이 되자 떨어지는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면서 왠지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애벌레는 고맙다는 듯 날 보고, 사람처럼 씩- 웃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버스 정류장의 종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꿈에서 본 애벌레는 나비이기 전 나의 회상일지도 모른다.

아마 애벌레였던 과거의 내가 나비가 된 미래의 나를 보고 환희의 미소 지었던 게아닐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 나비처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평소 눈으로 흘겨 보았던 마을의 벽화들도 한 장 한 장씩 사진 속 필름에 담아 감상하였다.

마음속 벽화는 어떤 색상으로 칠해져 있으며 무슨 디자인일지 상상하였는데,주인공이 된 꿈의 나비는 아직 내 안에 없다.
꽃향기를 내뿜어 나비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였던 과거를 돌이켜보니 미처 강하게 추진하지 못했던 아쉬운 일들이 새록새록떠올랐다.

퇴근 후 단골 커피숍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조그만 수첩에 글을 써보았다.

‘애벌레에서 숲의 나비가 된 내 모습은 아름다웠다. 조용히 떨어지는 어여쁜 나뭇잎보다 돋보였다. 숲의 바람이 일렁이며 속삭이듯 검은 숲속에서 내일의 밝은 태양이 뜨길 기다리는 한 소녀가 되어보려 한다.’

글을 쓰면서 무언가가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한결 즐거워진 퇴근길을 콧노래를 부르며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묵직한 손인 듯하여 순간 남자임을 직감했다. 너무 놀라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한참을 뛰다가 뒤를 돌아보니 버스 정류장에서 한 남자가 서서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서있었다. 잘 모르는 젊은 남자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너무 무서웠다.

재빠르게 택시를 예약하던 중 그 남자가 내 바로 앞에 서있었다.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떠보니 주변이 온통 푸르른 숲으로 변해있었다.
그 남자가 “괜찮니?”라며 말을 건네주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순정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듯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갑자기 쿵쾅쿵쾅 가슴이 뛰었다.

‘여긴 꿈속이고, 미소년이 나타났으니 곧 결혼할 남자가 생긴다는 예지몽인가?’
“마리, 너를 응원하고 있었어. 나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던 나비 소녀 맞지? 그땐 고마웠어.”
씩-웃는 모습을 보니 지난번 꿈에서 본 애벌레와 닮아있었다.
“푸른 잎을 먹는 걸 좋아해서 가끔 애벌레로 변해서 먹곤 해. 사람일 때 잎을 먹으면 쓴맛밖에 안 나서.. 애벌레로 변신하여 잎을 먹으면 정말 맛있어! 아, 넌 꽃을 좋아하지? 그래서 나비로 나왔던거야.”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 맞지?”
“맞아, 여긴 네 꿈의 세계야. 참 아름답고 평온한 숲을 꿈꾸고 있구나. 정결하고 깨끗한 숲을 만들어준 너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
“그게 뭔데?”
“앞으로 큰 행운이 닥쳐올 거야,자신 있니?”
“어떤 자신감?”
“행운이 다가와도 결코 죄를 짓지 않을 자신..”
“무슨 죄를 지어선 안되는 거야?”
“네가 애벌레였을 때를 기억해 봐,넌 할 수 있어!”
소년은 조그마한 초록색 애벌레로 변신하더니 내 손등에 앉아서 올려다보며 씩-미소를 지었다.

일어나 보니카페였고, 얼음이 다 녹아져있는 아메리카노가 테이블 위에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었다.

카페 문을 닫기 전, 재빨리 나와서 서늘해진 밤거리를 걸었다.

몽롱한 기분으로 옆을 바라보니 어둑어둑해진 축제 현장이 보였다. 더 가까이 들여다보니 고양국제꽃박람회라는 축제였다.

매년 열리는 축제지만 이번 주말에 간다면, 꽃과 나비들을 보면서 새로운 느낌이 들 것이다.
평범한 회사원인 나에게 큰 행운이라니…….

감당하지 못할 큰 상상의 세계가 펼쳐질까덜컥 겁이 났다.

어둠을 품어 무거워진 해가 지구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내 안의 두려움을 한 겹씩걷어내주었다. 여러 날들이 지나가고, 본격적인 장마가 찾아왔다.

자주 내리는 서늘 서늘한 빗방울은 두려움을 촉촉하게 적혀주고, 밋밋하고 허전한 마음 덩이들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한가로운 토요일, 여느 때처럼 흔들의자에서 손뜨개질로 인형을 만들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넓은 우주가 나타났다. 푸르른 자연이 아닌 광활한 우주에 거대한 행성들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앞에는 우주선이 떠다니고 있으며, 옆에는태양과 달, 지구가 보였다.

“안녕? 마리야.”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 소년이었다.
“마리야, 오랜만에 놀러 왔구나.네 꿈의 세계는 광활한 우주로 변했네. 네 이상향의 세계가 지구를 벗어날 정도로 커진 건 나의 영향이겠지? 네 성공의 실마리가 되어줄게!”
“성공의.. 실마리?”
“뜨개질하던 인형, 나에게 선물해 줄래?마리, 네 모습으로 만들어줘.”
“음.. 크게 어렵진 않지만 넌 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존재이잖아?”
“난 허상이 아니야.”
“그럼 현존한다는 거야?”
“맞아, 난 현실 세계에도 있어. 저기 보이는 지구는 조금 어둑하지? 2100년의 모습이야.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조금 더러워졌어. 네가 미래를 바꿀 수 있어. 평온한 네 숲의 모습을 지닌 지구로 말이야.”
“내.. 내가 어떻게 지구를 바꾼다는 말이야? 나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야…….”

“아니야, 너는 광활한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재능이 있어.”
“재.. 능?뜨개질이 취미이고 커피를 좋아하는 평범한 회사원인데..”
“바로 그거야! 멋진 네 모습을 기대할게. 이제 돌아가야 해.더 늦으면 너는 영영 우주 사슬 안에 묶이게 돼."
“시간이 있어? 여기는 꿈의 세계인데..”
“좋은 질문이야. 질문에 대한 해답은 네가 풀 수 있어. 이따 보자.”

소년은 알 수 없는미지의 세계를 말해주고는 떠나갔다.

잠에서 깨어나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소년과 우주의 모습…….

그런데 떠올려보니 우주에 있던 난 이미 죽어있던 것일까?

2100년엔 난 우주에 있었기에 오래 살운명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2023년이니, 100년은 못 살고죽었나 보다.내 비석엔 이름이 넉자 적혀있겠지?

최실마리라는이름을 지어주고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돌잔치에서 실을 잡았기에 실마리를 찾아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회적인 지도자가 되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주셨지만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해 개명을 부탁드렸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허락해 주시지 않았다.

중학생이 된 이래로 이름표에 ‘실’자를 빼서 이름을 ‘최마리’라고 고쳐 달았고 마리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다녔다.

나는 도대체 무슨 실마리를 찾는 것인가… 혹시범죄를 해결하는 경찰인가?

인터넷에 범죄학을 검색하였더니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인터넷 신문 기사들에 나왔다.

아니면 탐정일까? 명탐정이 등장하는 만화영화를 즐겨 보긴 하였지만 살인사건이 등장하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내 심장이 콩알만 해졌기에 이도 아닌 듯하였다.

고민을 거듭하며 커피를 내리고 있었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밤 8시.. 거리도 한산해진 일요일 저녁. 집 안에는 나만 있었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폰을 들어 확인하였다. 순간 자빠질 뻔했다.꿈에서 본 그 소년이었다.

“안녕? 나야. 꿈에서 본 소년. 문 열어줄 수 있니?”
“우리 집은어떻게 알았어?”
“난 널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야.”
“천.. 천사라고?”
“맞아. 사람들이 들으면 날 이상한 놈으로 취급하기 전에 문 좀 열어줘.”
“그.. 그래!”
소년은 처음 보는 교복을 입고, 18살 정도로 보이는 앳된얼굴이었다.

신발을 벗고,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더니 책가방을 열어 주섬주섬 무엇을 꺼내고 있었다.
“뭐를 꺼내는 거야?”

내 질문에 말없이 보여준 건 황금빛이나는 거울이었다.
“1년을 어려지게 해주는 마법의 거울이야, 이걸 사용하면 너에게 무언가를 가져가야 해.”
반짝거리며 광채 나는 거울을 건네주는 소년.
“고마워.. 근데 커피. 아니, 코코아 마실래?”
무심한 얼굴과 다르게 거울을 건네줄 때 떨고 있는 소년의 손을 보고, 긴장감을 풀어주려 말을 건네었다.
“내가 코코아 좋아하는 거어떻게 알았어?”
“대부분 코코아 좋아하지 않나? 나도 학생 때 잘 마셨거든..”
뜨거운 코코아를 벌컥 벌컥 마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등 뒤에 숨어있던 큰 날개를 활짝 펼쳤다.
“천사의.. 날개?”
“맞아! 널 안심시켜주려고, 아직 두려워하는 네 마음이 느껴져서.”
“미.. 미안! 내가 겁이 많아서 그래.내 마음까지 꿰뚫고 있다니..”
“모든 마음들을뚜렷이 볼 수 있는 상급 천사가 아니지만 난 네 마음의 색깔들이 눈에 보여. 파란색이면 평온함, 지금처럼 빨간색이면 두려움.”
“신기하다.. 네 이름은 뭐야?”
“내 소개를 깜빡했네. 나는 대소라고 해!”
“대소.. 천사?”
“그냥 대소라고 불러줘.”
“대소야, 만나서 반가워.”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대소는 손을 내밀어 화답해 주었지만 악수를 하는 손을 놓지 않았다.
“손 좀 놓아줄래?”
“미안! 아, 거메졌다.”
“뭐가?”

“네 마음의 색깔, 두려움이 극에 달하면 빨간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하기도 해.”
대소는 박수를 두 번 치더니 천사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변하였다.

천사의 옷은 황금빛거울보다 곱고 아름다웠고, 눈이 부셔 잘 쳐다볼 수가 없었다.

대소가 박수를 한 번 더 치더니 교복을 입은 평범한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네 마음의 색깔이 보여, 초록색으로 변했네. 다행이다.”

대소가 씩미소를 지어 날 보았지만 두려움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대소가 두렵지 않았다.
거울을 쳐다보니 빛이 나면서 무언가 보였다.

풍선 3개를 들고 하늘을 날고 있는 초등학생 때 내 모습이었다!

풍선에는 복잡한 형태로 무언가 적혀있었다. 한글이었다.
“이건 네 분신이야. 거울은 널 찾고 있었어. 소녀가 참으로 행복해 보이구나.”

“신기하다. 이 거울을 보면 1년이 어려진다고 했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천천히 설명해 줄게.소파에 앉아서 이야기할까?”
대소와 나눈 대화는 신기한 내용이 많았다.

한글로 말을 하면 풍선 안에 글자가 들어가며, 욕설과 같이 좋지 않은말을 하면 말들이 뽀족한 글자들이 생겨 풍선이 하나씩 터지게 된다고 하였다. 명예, 권력, 재물을 의미하는 3가지의 풍선에는 말뿐아니라 악한 감정이 들어가면 풍선 안에 헬륨을 액체로 만들어 풍선도 가라앉게 한다고 전해주었으며, 거울을 보고 절실히 기도를 해야 소원이 이뤄진다고 하였다.

풍선 3개를 들고 유유히 떠있는 내 모습을 보니 기뻤다. 화날 때는 잊어버리려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한 게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서 풍선이 터지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대소가 이어 말하였다.

“죄를 짓지 밀고 열심히 살아가면 풍선이 터지지 않고 환상적인 꿈을 만들어 선물해 줄 거야.”
대소의 말을 듣고 궁금증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도 떠있는 분신이 있는 거야?”
“아니, 순수한 꿈을 가진 사람들만 이 풍선을 타고 날아갈 수 있어. 실수를 한 건 죄가 아니야. 하지만 큰 죄를 저지르면 풍선은 소멸되고 말아.”
말을 이었다.
“넌 천사 같은 소년을 동경했지? 착한 남자가 이상형이었기에 날 만들어 냈어. 하지만 바로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어.”
“왜?”

“소년을 만나면 그를 위한 신부가 되겠다며 너 자신을버렸기 때문이야. 자신을사랑하지 않는 것도 큰 실수야.”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되어 무릎을 탁 쳤다.

서서히 실마리들이 해결되는 느낌이었기에 ‘실마리’라는 내 이름까지도 좋아졌다.
“방금 네 마음 긍정적인 분홍색으로 변했어. 네 풍선이 터지지 않길 기도할게. 그럼 난 가볼게.”
“뭐, 뭐라고?”
대소는 갑자기 1초도 안되어 눈앞에서사라졌다..

황금 거울은 식탁 위에 빛나고 있었고, 거울 안 내 분신 소녀도 보였다.
현실일까, 꿈일까. 꿈이라고 보기에는 꼬집은 내 볼이 꽤 시리다.

갑자기 흰 우유를먹고 싶어졌다. 마음을 가라앉혀줄 때는 우유가 최고이다.
우유를 다 마신 뒤, 서서히 눈이 감겼다.

식탁 위에서 팔베개를 하고 있었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 채로…….
6시간 후에 황금 거울을 보고 푸석해진 피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거울에게 말을 건넸다.
“거울아, 1년 전의 내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니?”
“네.”
거울 안에 소녀는 날 쳐다보며 말하였다.
놀라서 거울을 바닥에 떨어트렸지만 거울은 깨지지 않았다.

“기도가 필요해요, 간절히 기도해 주세요.”

소녀가 말한 대로 간절히 기도하자 온몸에열이 나면서 손, 발이 차가워졌다. 바늘이 찔리는 듯이 아파졌고 발버둥 치며거실을 굴러다니다가 기절을 한 채 일어나 보니월요일이었다.
바로, 출근해야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휴가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거울이 소원을 들어주었는지 궁금하여 집에 붙어있던 벽 거울을바라보는데 깜짝 놀랐다.

1년 전에 염색한 머리카락으로 변해있었으며, 무릎의 작은 상처까지 돋아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부도 1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대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야, 안녕?”

황금 거울 안에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대소야, 왜 들어가 있어?‘
“이제 나올 거야.”
번쩍 뛰어 거울 밖으로 나왔다.

거울 밖에 나온 대소의 몸은 인형처럼 작아져있었고, 거실을 펄쩍펄쩍 뛰며 걸어 다녔다.

“짠~ 놀랐지? 난 이렇게 작게 변하여 세상을 돌아다닐 수도 있어.”
“와, 놀라워.. 근데 정말 내가 1년 전의 몸으로 돌아간 거야?”
“맞아.”
“그럼 치러야 하는대가가 뭐야?”
“그건 수명과 관련이 있어. 1년이 어려질수록 수명은 10년이 줄어들게 돼.”
“뭐?”
“그러니, 1년 전의 네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만 귀한 인생의 시계를 돌리길 바랄게. 넌 100살까지 살 수 있었지만 이제 네 수명은 90살이야.”

황금 거울의 실마리가 풀리자 미리 물어볼 걸 후회가 들었지만, 돌이켜보니 돌잔치에서 실을 잡은 내가 장수하기를 바라며 ‘실마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40살이 되었다.

난 남편과 5살인 딸아이가 있다. 남편은 직장에서 만난 동료인데 내 직속 상사였다. 후배들을 잘 챙겨주는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육아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고, 현재 문화센터에서 뜨개질 강사로 일을하고 있다.

소소하게 동네 어르신분들의 옷을 수선해 드리는봉사도 하고 있다.
이웃들은 뜨개질 솜씨를 보고 책을 내보라며 권유해 주었고, 틈틈이 지필한 책이 다음 달에 출판될 예정이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라는 속담처럼 우리의 인생은 한 바늘과 꿰어져 함께 비단길을 만들어 가며 아름다운 인생을 향하여 걷고 있는 게아닐까?

가끔 비에 젖어 누군가에게 짓밟혀 더러운 비단길이라 하여도그 길을 기쁘게 걸어간다면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쌀쌀한 초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별다를 것 없이 행복한 나였지만 가슴 쪽에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물을 먹으면 괜찮아졌기에 크게 신경 쓰지않았었는데 오늘 가슴 위에피가 묻어 있었다.

곧바로 병원에 갔는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내가 유방암 초기라는 사실이었다.
‘청천벽력’이란 단어가 뇌리 속에 스쳐갔다.
터덜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병원에서 나와 생각난 건 바로 황금 거울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팠던 시기가 분명 4개월 전부터였으니까 그전으로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현관문을 열자 사랑스러운 딸 예리가 똘망 똘망 한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어디 다녀와? 나 배고파.”
“응, 금방 맛있는 거해줄게.”
예리의 저녁 식사를 차려주고, 책상 서랍을 열어 황금 거울을 찾았지만 온몸이 아파져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일이 떠올랐다.

밥을 다 먹고, 새근새근 잠든 예리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날 발견할 때 남편이 놀라지 않도록 거실 소파에 앉아거울을들고 기도를 했다.

온몸이불덩이처럼 뜨거워지더니 마치 용암 안에 있는 듯하였다.거실 바닥을 마구 뒹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소파 위에기절하여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남편과 예리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여보, 정신이 들어?”
“엄마, 괜찮아?”
걱정해 주는두 사람을 안심시키려고 주방으로 달려가 아침을차려주었다.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그런데 황금 거울이 없어졌다! 주변을 살펴보니 딸 방 침대 위에 놓여있었다.
“엄마, 고마워! 나 이런 거울 가지고 싶었는데, 친구들에게 자랑해도 돼?"
“아니, 예리만 봐. 혹여 잊어버리면 엄마가 슬프니까.”
“응, 이 거울은 어디서 샀어?”
“산 거는 아니고 선물 받은 거야.”
“누구한테?”
“천사한테.”
천사라는 단어를 듣자 딸은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며 물어보았다. 하지만 딸은 어렸고, 알려주면 황금 거울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되기에 순수함이 변질될까 봐 두려웠다.
다음 날, 다른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예상대로 유방암에 걸려 있지 않았다.

그날 이후, 유방암 예방과 관련한 책을 일거나 강의를 들으면서 생활 패턴을 고쳐나갔다.

1년이 지난 뒤에 검진을 받아보니, 유방암에 걸리기는커녕 평균 나이보다 더 건강한 신체 나이를 가지고 있었다.

유방암을 예방하는데 좋은 성분을 가진 브래지어도찾아보았지만,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어서 유방암 예방에 좋은 성분을 함유한 브래지어도면을 그려서 변리사님을 찾아 특허 출원을 하였다. 남편은 창업을 해보라고 권하였기에 시도를 해보았다. 발품을 팔며 뛴 결과 3년 만에 각종 인증을 받고 출시하였으며, 유방암을 예방해 주는 브래지어로첫 홈쇼핑 방송에서 대박을 터트리게 되었다.

일명, ‘최실마리’라는브랜드로 브래지어를판매하였으며 출판하였던 뜨개질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있었다. 동종업계분들의 속옷 세트를 함께 판매하였으며, 대박 행진은 연이어 이뤄졌다.

혼자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회사가 성장하여, 남편도 일을 그만두고, 도와주었다. 남편의 리더십 덕분에 회사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영어를 잘하는 남편은 글로벌한 회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새벽에 일어나 잠을 쪼개어 무역 공부를하였다.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남편이 참 고마웠다.

사랑한다는 편지를 써서 소파에서 잠이 든 남편의 머리맡에 살며시 두었다.
어느덧 난 50살이 되었다. 딸은 수줍음 많은 여중생이 되었다.
예전에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귀엽고 사랑스러워 자주 껴안아 주었다.
최실마리브래지어는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로 자리매김하였다.

한편 남편은 남성들을 위한 속옷도 필요하다며 전립선암을예방하는 팬티 연구에 몰두하였다.
다른 속옷을 제작해 보라는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난 오직 브래지어만고집하며 만들었다.

쉼 없이 달려온 덕에 브래지어는 무려 1,500종이 되었다. 전 세계에는최실마리브래지어를판매하고 있는 500여 개의 체인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1인 창업가들이만든 브래지어들도함께 판매를 해주어 사회적 기업으로써 성공한 사례로 많이 소개되었다.

회사는 나날이 고공행진을 기록하며 여러 나라에 브랜드화되어 퍼져갔다.

이제 60살이 되었다. 100년이라는 수명에서 20년은 거울을 사용하여 없어졌기에 남은 시간도 뜻있는 인생길을 걸어가고 싶었다.

딸은 밤마다 브래지어를 연구하는 나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인지 미술을 전공하고, 박사과정을 마쳐 대학교수가 되었다.

어제 남편과 상의를 하였는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하였고, 최실마리재단을 설립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재단 설립 목적은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저소득층 청년들을 대상으로 브래지어디자인을 공모하여 시상을 하고 상금을 수여하는 것이다.
재단이 잘 운영되는지 확인한 뒤 여지까지 출장으로 가지 못하였던 나라들을 크지 않은 자금으로 해외여행 계획을 세웠다.

태국을 여행하던 도중, 코끼리를 타고 내리는 데 전화가 걸려왔다. 최실마리 재단의 뜻에 감동을 받은 영화감독이 나의 인생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부끄러웠지만 감독의 열정은 대단하였기에,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승낙했다.

9년이라는 기간동안처음으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내 나이는 69살이었다.

한국으로 귀국한 날, 최실마리재단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재단에서 지원받아 공부하던 대학생의 편지였다. 어머니의 심장이식 수술을 위한 장기기증이 필요하여 가족들 몰래 본인의 심장을 떼어주려는 청년의 사연이었는데, 본인은 심장병이 가지고 있었던 터라 심장 이식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 건강한 심장을 발 벗고찾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높은 병원비를 감당하지도 못하는 가난한 형편이기에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효자에 재능도 많은 청년이기에, 내 심장이라도 떼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최근에 심장과 폐가 약해졌다며 의사 선생님께 전달을 받아 떼어줄 수 없었기에 심장 이식 수술을 결심하였고, 긴 유서를 썼다. 그리고 황금 거울 앞에 간절히 기도를 했다.

“제 몸이 1년 전으로돌아가게 해주세요. 가족들이 저로 인해 슬픔을 겪지 않게 해주세요.”
온몸이 뜨거워지며 기절하여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건강해진 몸으로 곧바로 심장이식 센터로 찾아가, 2082년 봄날, 70살의 나이로 소년의 어머니에게 심장이식을 해주고 눈을 감았다.
유서에 적힌 내용대로 최실마리 재단은 사용한 브래지어를 버릴 때가 되면 재단에서 이를 회수하여 구입 금액의 반을 돌려주었고, 획기적으로 의류 폐기물을 줄이는 환경 캠페인을 펼쳤다.

이런 헌 브래지어를 최실마리 공모전에 도전하는 청년들이 가져가면 더 큰 상상력으로 아름답게 디자인되어 재탄생됐다.
딸 예리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선의 여행’이라는 그림 동화책을 출간하였다. 동화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에 아름답고 고운 선이 살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서 한 여인이 철야로 손수 제작한 비단 한복에서 떨어진 실이었습니다. 실은 전쟁으로 난폭해진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싶어 수백 년 동안 지구를 감쌀 수 있을 정도로 길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놀라지 않게 투명한 선이 되어, 세상을 여행하다가 전쟁 때문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를 보고 안쓰러운 나머지 자신의 몸을 떼어내 아이가 잠이 들었을 때 몰래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 외에도 도와줄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기후 변화로 인하여 한순간에 집을 잃고 환경 난민이 되어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어른도 웅크린 채로 떨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저릴 정도로 아픔을 느낀 선은 전력을 다해 지구를 감싸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구는 동글동글한 모양이라 감싸기 좋았습니다. 선이 사람들을 리본으로 묶은 뒤 오직 1평 안에서만 지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움직일 수 없어 답답함을 느낀 사람들이 울부짖었고, 배가 고프단 생각이 들어 공중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외치면 그 음식이 튀어나와 공포에 떨면서 먹었습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면 갑자기 몸 뒤에서 변기가 튀어나오는 등 마법 같은 일들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외계인의 짓이라며 쉼 없이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 해결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6일째 되던 날,비로소 선은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두꺼운 파이프 통이 된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통 안에 말하며 소통하였지만 소리가 합쳐져서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어느 날, 선이 “조용!”이라고외치자 전 세계 사람들이 3초간의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선은 사람들을 놓아주었습니다. 선은 고생한 사람들을 위하여 리본으로 지구를 예쁘게 묶어주었고, 거대한 굉음을 내면서 도로와 철도로 변하였습니다. 전 세계의 자동차와 기차, 배까지 전부 지나갈 수 있는 다차원의 신비로운 길도 만들어주었습니다. 신께서 주신 선물을 알게 된 사람들은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소중한 존재이지만 서로 싸우면서 자유로운 세상을 즐기지 못하였던 지난날들을 반성하면서, 점점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게 된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생을 가슴속에 담고, 영원히 행복해졌답니다.”

예리가 천국에서 동화 내용을 말해주었고, 엄마를 생각하며 동화를 썼다며 칭찬해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기특한 예리의 머리를 힘껏 쓰다듬어 주었다.

따뜻한 날씨와 봄의 향기가 느껴지는 천국의 느티나무 밑에서 산들산들한 바람을 맞으며 서로를 보고, 씩-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바로, 대소였다!

“안녕? 오랜만이야, 내 미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대소야, 안녕? 이거.. 늦게 줘서 미안해.”

지상에서 깜빡하고 잊어버렸던 나와 닮은 뜨개질 인형을 건네주었다.

“정말 고마워!”

대소는 인형을 받고, 펄쩍펄쩍 뛰며 감동하였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천국에서 예리의 엄마가 되고 싶었던 난 40살의 모습이었으며, 예리는 중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서로의 얼굴을 보자 볼이 빨개지며 부끄러워하였다. 둘이 좋아하는 눈치였다.

“둘이 재미있게 놀다 오렴.”

“감사합니다.”

씩씩한 답변을 한 대소는 예리의 손을 잡고 푸르른 초원을 거닐며 끝없는 펼쳐진 별빛을 담은 천국의 하늘 계단을 통해 걸어갔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떠오르는 시구절을 읊으며 따뜻한 햇살과 풀 내음을 느꼈다.

그때 남편이 나타났다.

“왜 벌써 왔어요? 더 있다 오시지…”

“감독이 당신 영화를 무려 16년 동안 열심히 만들었더라고… 그래서 기다렸다가 보고 왔지. 관객들 반응도 매우 좋아. 전 세계의 40여 개국에서 당신 영화가 상영 중이야. 축하해!”

“회사는 어떻게 되었어요?”

“재단에서 장학금 받고,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우수하게 대학교를 졸업한 한 청년이 있는데 우리 회사에 취직을 했어. 성실하고, 똑똑한 데다가 CEO의 자질도 갖춘 인재였기에 회사를 맡기고 왔어. 아! 그 청년의 어머니가 당신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 청년이었군요. 잘 되어 기뻐요.”

“내가 만든 남성용 팬티도 잘 팔린다~~”

“고생 많았어요.”

“당신도.. 꿈만 같았어……. 모든 게”

“맞아요, 아마 최실마리 꿈을 꾸었을 거예요.”

“그렇지? 이건 소설이니까.”

“소설이라고요? 그럼 우리가 허구란 말이에요?”

“그럴지도 아닐지도. 아니, 그럴 수도? 아닐 수도.”

“뭐…뭐예요?”

“나도 잘 모르겠네.. 하하하.”

 

- 끝 -

 

창의 장용희(創意 張龍熙) 작가 소개

시,시조,민조시,디카시,동시,가시,표어,동화,일기,수기,수필,소설,동극,

영화시나리오, 웹툰시나리오, 콩트, 독설리즘, 문학평론, 영화평론,

산문 분야에서 수상하였으며 다양한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음.

저서 '창의 문학집', '코로나19 선생님의 일기' 출간함

생명사랑협회

생명존중, 자살예방, 인성교육,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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