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회 코벤트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김태헌 - 모래가 되는 시간

강명옥 | 기사입력 2023/08/05 [01:01]

제56회 코벤트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김태헌 - 모래가 되는 시간

강명옥 | 입력 : 2023/08/05 [01:01]

 

모래가 되는 시간

 

김태헌

 

 

 

파도가 갈기를 세운다. 바다 깊은 곳에서 바위가 깨어지고 부서질 때마다 으르렁거린다. 표독스럽게 밀어붙이고 물보라를 일으켜 후려친다. 거친 호흡으로 몰아치다가 달빛 교교한 밤이면 굽 낮은 물이랑으로 찾아온다. 모래는 파도에 시달려 쪼개지면서 말쑥하게 빚어진 걸작이다. 태곳적 시간의 흔적조차 지워버린 채, 아픔 품고 부서진 바위의 부스러기다. 잔물결이 모래를 어루만지면 지난 이야기를 속삭인다.

  

바닷가를 거닐었다. 햇빛 받아 반짝이는 모래가 부드러운 감촉으로 발을 감싼다. 소금기 머금은 바닷물에 곱게 씻고서 일광욕을 즐긴다. 물기를 털어내고 단장하여 금세라도 바람에 날릴 듯하다. 모래톱에 앉아 경계를 허물고 빗장을 푼다. 귀를 쫑긋 세우고 모래가 품은 아득한 이야기를 듣는다. 거침없는 파도에 깎이고 부서진 시련이 안타깝다. 모래는 견디기 힘든 인고의 시간이 새겨진 밀어를 들려준다. 

 

덕적도 서포리 민박집에서 짐을 풀었다. 칠십 중반의 주인이 일행을 반겼다. 넉넉하고 푸근한 인상으로 정성껏 맞아주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허리가 기역으로 굽었다. 세월이 비껴간 듯 엷은 주름살이 파르스름한 달빛에 젖어 모래처럼 부드러웠다. 어둠이 밀려왔다. 고향 집처럼 아늑하여 긴장의 끈이 풀렸다. 솨르르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문지방을 넘어왔다.

  

장지문에 스며든 달빛이 방안을 기웃거렸다. 주인이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가슴 먹먹한 세월의 응어리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평온한 모습에선 구김조차 보이지 않았다. 켜켜이 쌓아놓은 삶의 젖은 자락을 실타래가 풀리듯 자초지종 풀었다, 막힘없고 은근하며 푸근한 목소리였다. 큰 시련이 파도처럼 들이닥쳤다는 이야기가 애절했다.

  

섬에서 태어나 뭍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건넛마을의 청년과 결혼했으나 행복이 오래 가지 않았다. 남편은 고깃배의 선장이었다. 군산 앞바다에서 태풍 만난 배가 뒤집혀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열두 명의 선원 중 한 명만 살고, 남편은 주검으로 돌아왔다. 시신이나마 찾았다며 감사한 마음을 지켰다. 서른일곱 나이에 큰딸이 겨우 열네 살이었다. 혼자 힘으로 네 딸을 길러야 했다.

  

남편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슬픔을 꾹꾹 누르고 살아온 세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처신을 조금이라도 잘못한다면 마구잡이 이야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터였다. 섬이라는 지리적 공간은 좁고도 좁았다. 소문이 고개 넘어 시댁까지 삽시간에 퍼질 터였다. 드러내지 않고 은근히 깔보며 무시하는 차가운 시선을 견디고 이겨내야 했다. 지아비를 앗아간 바다만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자식만이 의지가지였다. 세파의 거친 파도 따윈 두렵지 않았다. 자식을 보며 위안 삼고 기쁨으로 사랑하였다. 갯것을 잡고 건져 올리며 산나물을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텃밭 일구고 땔감을 마련하는 등 억척스럽게 일했다. 지친 몸으로 질척이는 삶의 고비마다 꾸역꾸역 불어오는 마르고 거센 바람을 피하지 않았다.

  

보릿고개 넘는 고달픈 삶의 자락이 나풀거렸다.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세파와 계면조 가락을 가슴에 묻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야속했지만, 상처 난 아픔도 삶의 일부였기에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제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밀어닥쳐도 삶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스스로 모래가 되어가는 삶을 살았다.

  

딸들의 얼굴에 발그스름한 꽃물이 들었다. 눈부신 아름다움이 빛날 때 눈 밝은 사위를 맞아들였다. 품 안에 고이 간직하며 애지중지 키워 떠나보내는 날, 아쉬움보다 기쁨이 더 컸다. 시름만 가득 찼던 푸르디푸른 시간을 아프게 흘려보냈지만, 삶을 보상받는 선물이었다.

  

자기 삶을 버린 희생의 시간은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거칠고 사연 많은 삶이 금빛 모래가 되기까지 수없이 부서졌지만, 꿋꿋하고 눈부셨다. 고난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강인하게 버텨온 세월. 거침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거센 시련에 맞서 야무진 모래가 되었다. 백사장의 금빛 모래처럼 반짝이며 빛났다.

  

삶은 되새김질할 수 없는 절절한 서사시다. 도란거리는 이야기에 밤이 깊었다. 해송 가지에 걸쳐 있던 무심한 달빛도 민박집 지붕 위로 옮겨 앉았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의 맑은소리도 다소곳해졌다. 애틋하게 수런거리던 솔바람의 청아한 노래가 귓전에 스쳤다. 총총 빛나는 별들이 내려와 금빛 모래를 은은하게 감싸는 밤. 잠들지 못하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밤새 뒤척였다.

 

▲ 수필가 김태헌  © 강원경제신문

 

 김태헌(金泰憲)

  ► 2006년 국제문예 수필 등단

  ► 현재) 한국공무원문인협회 경기지회장, 경기수필가협회 회원, 한국디지털문인협회 회원

 

 문학관련 수상 내역

  ► 2006년 국제문예 수필 등단 신인문학상

  ► 2006년 법무부공모전 은상(법무부장관상)

  ► 2020년 제20회 공무원 연금문학상 공모전 은상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이사장상)

  ► 2020년 제21회 산림문화작품 전국 공모전 장려상 (시수필 부문산림조합중앙회장상)

  ► 2022년 제29회 빛창 시인이 되다 전국공모전 입상 (광주한빛안과)

  ► 2022년 평택사랑 전국 백일장 공모전 장원 (평택시장상)

  ► 2022년 12회 대한민국독도문예대전 전국 공모전 특선 (경북예총회장상)

  ► 2022년 ()충무공김시민장군 추모사업회, 6회 전국 통일문예작품 공모전 최우수상 (충남도지사상)

  ► 2022년 10회 등대문학상 전국 공모전 우수상 (울산항만공사사장상)

  ► 2022년 1회 순천스토리텔링 전국 공모전 우수상 (순천문화재단이사장상)

  ► 2022년 6회 경기수필공모전 대상 (()경기한국수필가협회장상)

  ► 2022년 1회 한국디지털문학상 전국 공모전 은상 (한국디지털문인협회장)

  ► 2023년 2회 글로벌문학상 전국 공모전 장려상 (글로벌뉴스통신 발행인)

  ► 2023년  14회 허암예술제 전국 백일장 공모전 차중 (인천광역시 서구청장)

  ► 2023년 3회 상춘문학상 전국 공모전 장려상 (세계유산 무성서원원장)

  ► 2023년 울주이바구 전국 공모 최우수상 (울주문화재단이사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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