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사회의 아름다운 엇박자

차용국 | 기사입력 2021/03/07 [06:09]

암울한 사회의 아름다운 엇박자

차용국 | 입력 : 2021/03/07 [06:09]

▲ 황지의 풀잎, 박봉우



암울한 사회의 아름다운 엇박자

- <황지의 풀잎>으로 본 박봉우 시론

 

차용국 시인문학평론가

 

1. 휴전선을 보다

 

박봉우 시인의 시비(詩碑)<휴전선>은 경의선 임진강역 옆면 한 구석에 서있다. 남북분단의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에 그의 <휴전선> 시비를 세운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적절하다. 박봉우 시인보다 조국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시를 일관하여 지은 선구자는 없기 때문이다.

박봉우 시인은 199031, 전주시립도서관 촉탁사원으로 재직 중 별세했다. 57세였다. 장례는 민족시인 박봉우 선생으로 치렀고, 전주시립효자공원묘지에 안장했다. 3년 후, 19936월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박봉우 시비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199412, 그가 자란 광주의 사직공원에 그의 시 <조선의 창호지>를 세긴 시비를 건립했다. 2년 후, 1996년 민족문학작가회의는 통일동산 시비 건립추진위원회로 개편하고, 2001<휴전선> 발표 45주년을 기념하여 경의선 임진강역 구내에 <휴전선>을 세긴 시비를 건립했다. 시비는 태극을 상징하는 둥근 돌 조형물에 <휴전선> 전문과 그의 얼굴을 암각 했다. 시의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썼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휴전선> 전문

 

<휴전선>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이며, 1957년에 간행한 첫 시집의 수록 작품의 표제명이기도 하다. 또한 1976에 간행한 제4시집 <荒地의 풀잎>에 재수록 한 시다.

박봉우 시인은 1957년에 첫 시집 <휴전선>을 발간한 이후, 1959년에 제2시집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 1962년에 제3시집 <四月火曜日>, 1976년에 제4시집 <荒地의 풀잎>, 1985년에 제5시집 <서울 下野式>, 1987에 제6시집 <딸의 손을 잡고>를 간행하였으며, 1991년에 유고 시선집 <나비와 철조망>을 펴냈다. 시인의 산고를 거쳐 탄생한 시집 어느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만, 4시집 <荒地의 풀잎>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우선 이 시집의 구성을 살펴보면, 3부로 편집되어 있는데, 1부와 제2부는 1962년부터 15여 년 동안 발표한 시로 꾸몄으며, 3부는 이미 발간한 제1~3시집에 수록된 작품 중 17편을 선별하여 실었다. 하여 이 시집에는 1950년 전쟁의 폐허와 상흔, 1960년대 미완으로 끝난 4월 혁명 및 독재와 좌절, 1970년대 사회의 모순과 정신적 고뇌가 고스라니 담겨있으므로 당시의 사회와 박봉우 시인의 시정신을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 시집은 그가 1975년 서울 생활을 접고 전주로 이사하여 정착한 이후 1976년에 발행했다는 점에서 박봉우 시인의 삶과 시세계의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의미도 적지 않다.

개인도 사회도 아픈 상처는 치유되어야 하고, 최선의 치료제는 화해와 포용이다. 그래야 상생의 길이 열린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뻔한 군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더하여 지금은 비록 많은 부침이 있기는 하지만, 남과 북 정상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도 하고, 판문점에서 양측 정상이 만나 평화와 상생을 논의하기도 하는 시대이니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19537월 일단 휴전으로 막을 내린 1950년대 후반의 사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북한은 철천지원수이고, 반드시 멸망시켜야만 할 적이었다. 감히 남북의 평화니 상생이니 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조심스럽고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는 금기어에 가까웠다. 철저한 반공과 멸공의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문학계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런 극단의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는 사회를 걷어차고 22살의 패기 당돌한 젊은 시인이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으로 당당하게 당선된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황지의 풀잎> 편집 후기에서 조태일 시인은 <휴전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 대부분의 시인들이 기진맥진한 채 꽃과 여인과 술과 혹은 병든 자아의 한구석을 노래하며 자위하고 있을 때 박봉우 시인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휴전선)라고 우리의 뼈아픈 분단의 현실과 민족의 갈등을 온몸의 사랑으로 놓치지 않고 노래함으로써 민족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튼튼히 하였으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앞을 내다보는 자유분방한 시정신으로 전쟁과 함께 도사리고 있는 시의 폐허 속에서 시의 희망까지를 일깨워 주었다.''

 

조태일 시인의 편집 후기처럼 남과 북을 공동체로 보고 평화와 상생을 갈망하는 정서를 깊은 시심으로 형상화한 <휴전선>은 당시 문학계에서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휴전선>은 민족시다. 민족시는 그 민족의 언어 감각이 녹아있어야 생생한 생명력을 더한다. <휴전선>은 산문시의 형식을 빌려 쓰고 있지만 우리말의 운율이 풍부하게 살아있는 언어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시를 소리 내어 읽어보면 힘찬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우리말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3음보, 4음보 시어의 절절한 배치에서 생성되는 자연스러운 리듬감이라 하겠다. 박봉우 시인은 세대를 앞선 혜안으로 조국과 민족이 가야만 할 평화와 상생의 길을 우리말의 고유한 운율에 실어 시를 지어낸 민족 시인이었다.

 

2. 시대를 앞선 민족 상생의 엇박자

 

박봉우 시인이 꿈에 그린 조국, 간절히 소망하며 그리워하는 조국은 쉬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동족 간의 반목의 골은 깊어만 갔다. 남쪽은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패가 극에 달했고, 북쪽은 김일성 유일체제가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다. 조국은 혼탁하기만 했다. 그는 혁명을 기다렸다.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을까? 드디어 1960419일 자유당 독재와 부패에 항거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그는 4월 혁명의 감동과 기다림을 <소묘33><소묘23>에서 절절하게 노래한다.

 

우리의 숨 막히는 푸른 4월은

자유의 깃발을 올린 날.

 

멍들어버린 주변의 것들이

화산이 되어

온 하늘을 높이높이 흔들은 날.

 

쓰러지는 푸른 시체 위에서

해와 별들이 울었던 날.

 

시인도 미치고,

민중도 미치고,

푸른 전차도 미치고,

학생도 미치고,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의 얼굴과 눈물을 찾았던 날.

 

<소묘 33> 전문

 

노래하자, 노래하자

니빨을, 황토니빨을 갈고

<참으로 오랜만에>

시인과 태양 앞에

행렬을 짓고, 행렬을 짓고

오랜만에

목이 터지는 바다의 목청으로

노래하자, 노래하자

참으로 오랜만에

니빨을, 황토니빨을 갈고

<소묘23> 전문

 

<소묘 33>을 보면 박봉우 시인에게 4월 혁명이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왔는지 알 수 있다. 그는 4월 혁명에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그에게 4월 혁명은 '자유의 깃발을 올린 날', '온 하늘을 높이높이 흔들은 날', '해와 별들이 울었던 날',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우리의 얼굴과 눈물을 찾았던 날'이다. 그래서 <소묘 23>에서와 같이 '황토니빨을 갈고/<참으로 오랜만에>', '행렬을 짓고', '목이 터지는 바다의 목청으로/ 노래하자'고 외친다.

이외에도 박봉우 시인이 4월 혁명을 노래한 시는 많다. 그 중에는 '소묘'라는 제목을 붙인 시가 많이 보인다. <황지의 풀잎> 3부에 수록된 시 중에서도, 위에서 본 <소묘33>, <소묘23> 외에도 <소묘1>, <소묘4>, <소묘5> 등이 그것이다. 소묘의 사전적 의미는 연필, 목탄 등으로 사물의 형태와 명암을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밝음과 어둠, 희망과 좌절이 동시에 느껴지는 어감(어감)이다. 4월 혁명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간절함과 혁명의 정신이 사라져 가는 조국 현실에 대한 절망과 한을 내포하는 제목으로 볼 수 있다.

 

4월의 피바람도 지나간

수난의 도심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구나.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갈라진 가슴팍엔

살고 싶은 무기도 빼앗겨버렸구나.

 

아아 저녁이 되면

자살을 못하기 때문에

술집이 가득 넘치는 도심.

 

약보다도

이 고달픈 이야기들을 들으라

멍들어가는 얼굴들을 보라.

 

어린 4월의 피바람에

모두들 위대한

훈장을 달고

혁명을 모독하는구나.

 

이젠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가야 할 곳은

여기도,

저기도, 병실.

 

모든 자살의 집단 멍든 기를 올려라

나의 병든 <데모>는 이렇게도

슬프구나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전문

 

19613, 조선일보에 발표한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박봉우 시인은 4월 혁명의 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혁명의 정신이 변질되어 가는 조국 현실을 슬퍼하는 시다. '4월의 피바람도 지나'갔건만, 조국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고, 사회적 갈등은 끊임없이 데모로 분출되고, 부패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그가 보기에 난장판처럼 갈갈이 찢어지는 조국, 민족 상생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상은 '어린 4월의 피바람에/모두를 위대한/훈장을 달고/혁명을 모독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야 할 곳은/여기도/저기도, 병실'이라며, '나의 병든 <데모>는 이렇게도/슬프구나'라며 한스러운 심정을 토로한다. '자살, 병실, 병든 <데모>' 등과 같은 극단적인 시어와 절망감 진한 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극단의 정신적 고뇌가 엿보인다. 조태일 시인도 <황지의 풀잎> 편집 후기에서 이를 함의하는 글을 썼다.

 

''419 혁명의 다한(多恨)하던 시절, 길고 광활한 얼굴에 잡초처럼 무성한 수염이며 어느 한곳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이글이글 불태우는 눈동자며 어떠한 악도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 거리를 누비며 '거리의 시인'으로서 419 혁명을 노래하다가 병옥(炳獄)에 갇히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병원에 갇힌 자신을 오히려 조국과 민족의 모습으로 노래하기도 하며, 병들어 있는 사회와 병들어 있는 인간들이 민족 시인을 가두었다고 몸부림치며 밖에다 대고 ''병이라면 잠이 오지 않는 것이 병인가''라고 외치기도 한다.''

 

조태일 시인이 술회한 것처럼, 박봉우 시인에게 4월 혁명은 희망이었고 좌절이었다. 그는 자신이 꿈에 그린 조국은 4월 혁명의 정신에서 시발한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러나 4월 혁명은 미완으로 끝났고, 설상가상으로 19615월 조국은 군사정권의 쿠데타에 정령 당하고 만다.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았고, 혁명은 또 모독당했지만, 여전히 혁명을 꿈꾼다.

 

3. 모독당한 혁명의 황지에서 피는 조국

 

언젠가는 터져야 할

나의 혁명 앞에서

나는 귀여운 잠꼬대를 한다

하나하나 저금통에 넣은

여러 모의 얼굴들이

자기와 자유를 찾을 때

장엄한 깃발은 휘날리고

엄청난 행진곡은 시작되는 것

누구를 위해서 죽을 순 없다

나를 위해서도 죽을 순 없다

녹슨 철로 위에

무성한 잡풀들의 철로 위에

나의 사랑은 빗발쳐야 하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을

용서 받을 순 없다

사형대 위에 사라지는 목숨일지라도

나는 어머니와 조국과

사랑의 손이 있는 걸

언젠가는 터져야 할

나의 묵중한 혁명 앞에서

목이 마른 황지의 풀잎

목이 마른 황지의 태양

내가 사는 땅이 있는 한

험악한 길과 가시길이라도

더욱 굳건한 의지와 신앙으로

나는

나의 황지에

조그마한 풀잎의 욕심으로

혁명을 모독하고

더욱 사랑하련다

혁명의 아침을......

 

<황지의 풀잎> 전문

 

박봉우 시인은 혁명이 모독당한 조국이지만, 언젠가는 혁명이 또 터질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녹슨 철로 위에/무성한 잡풀들의 철로 위에/나의 사랑은 빗발쳐야 하는 것'이라며 자신을 다그친다. '내가 사는 땅이 있는 한/험악한 길과 가시길이라도/더욱 굳건한 의지와 신앙으로' 스스로 선택한 조국을 찾아 가겠다는 결의를 보인다. 조국의 '혁명의 아침을' 기다리며 각오를 다지는 시적 언술이 사뭇 장엄하고 숙연하다. 그는 순교자와 같이 오로지 조국을 사랑했다. 그는 스스로 '나의 직업은 조국'이라고 말했다. 1969년에 발표한 시 <잡초나 뽑고>1연에서 그렇게 쓰고 있다. 얼핏 들으면 식상한 애국시의 한 소절을 연상할 수도 있을 듯하지만, 이 시어야말로 그가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할 삶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말이다.

 

오늘밤 머언 별들을 보면서

나의 직업은

조국.

 

연탄 냄새 그득 풍기는

우리의 사회에

선량한 나의 가정은

가을

빈 주먹.

 

갈라진 가슴팍에

우거진 잡초들과

사상.

 

그 속에 우리집이 있다

그림 역사가 있다.

 

오늘의 나의 손은

현실을 뽑으며

진저리 나는 나의 행동에

추파를 던지는 속셈이다.

 

<잡초나 뽑고> 전문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 및 사회의 정서와 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삶의 길을 선택한다. 몇 가지의 선택지가 놓여 있을 것이다. 대략 순응, 저항, 그리고 제3의 길이다. 박봉우 시인의 조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작과 발표 시기와 사회를 연결하여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 시를 발표한 1969년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치유되지도 않았고, 4월 혁명의 정신이 군사정권의 총칼에 무너진 시대였다. '연탄 냄새'처럼 불의와 위험한 극단적 사상이 잡초처럼 난무하고 있는 사회였다. 그가 기다리는 조국의 모습이 아니었다.

박봉우 시인은 이러한 시대적사회적 환경에 순응하는 길을 선택하지도, 그렇다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비록 강한 울분을 토로하는 몇 편의 시에서 저항의 감정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답답함과 비루함에 대한 심정의 표출에 가깝다. 그의 조국은 특정 이념이나 집단에 순종하거나 저항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꿈에 그린 조국은 남과 북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포용하며 상생하는 나라다. 이러한 심정은 1971년에 발표한 시 <황지에 꽃핀>에 절절하게 그리고 있다.

 

남과

북으로 나누어 산 지도

오래 되었다

 

녹슨 철로 위에

진달래만

서글프다.

 

어떤 이는 절실히

통일을 부르짖고 갔지만

역사는 잔잔하다.

 

언제 서로 만나고

살 것인가

조국은 아프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것은,

 

고향과 자유와 평화를

목마르게 부르짖는

절규다 진통이다.

 

나는 남

너는 북

양단된 가슴팍에

서로의 비극은 뼈아프다.

 

나비들은 나비들은

철조망을 오고 가고 하는데

답답한 벽은

언제 무너질 것인가

누구의 힘으로 무너질 것인가.

 

한 핏줄

한 겨레가

온통 합창하는 날

남북이 서로 마음 터놓고 만나는 날......

 

녹슨 철로 위에

진달래는 훤히 피어 웃으리라.

 

그때 내 조국 무덤 곁에

역사는 아지랑이 같이 다시 피어나고

우리는 가난하게 산 것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황지에 꽃핀> 전문

 

군사정권이 길어지면서 조국은 독재의 병폐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남과 북은 더욱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며 체제 경쟁에 혈안이다. 반공과 멸공의 이데올로기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민족 상생은 점차 멀어지고, 언로가 막히고 숨이 막히는 사슬에 묶여 있는 조국을 그는 '조국이 아프다', '양단된 가슴팍에/서로의 비극은 뼈아프다'고 절규한다. 절망에 빠진 그는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1975년에 시 <서울 하야식>을 발표하고 전주로 내려간다.

 

긴 겨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모두 발버둥치는 벌판에

풀잎은 돋아나고

오직 자유만을 그리워했다

꽃을 꺾으며

꽃송이를 꺾으며 덤벼드는

난군 앞에

이빨을 악물며 견디었다

나는 떠나련다

서울을 떠나련다

고향을 가려고

농토를 찾으려고 가는 것은

아니겠지

이 못된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옥토를 지키는 것

봄은 오는데

긴 겨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랜 역사의 악몽 속에서

어서 깨어나 어서 깨어나

보리밭에 녹두밭에

석유냄새 토하며 쓰러질

서울 하야식

외진 남산 기슭의 진달래야

찬 북녘 바람은 알겠지

소금장사

쌀장사

갈 곳도 없는

고향도 없는

어서 서울을 떠나야지

서울을 떠나야지

 

<서울 하야식> 전문

 

암울한 시대를 온 몸으로 견디며 조국을 사랑하면서 민족시의 터를 일구었던 박봉우 시인은 홀연히 서울을 떠났다. 친구가 마련해 준 전주시립도서관 일을 하면서 1990년 영면할 때까지 살았다. 천재 민족 시인의 조국 사랑의 서장도 여기서 멈추었다.

 

4. 오로지 시로 말하는 시인의 표상

 

1976년에 초판을 발간한 <황지의 풀잎>은 한국 현대사와 박봉우 시인의 삶과 시정신을 통시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집이다. 박봉우 시인은 당시 매우 민감한 사회 현실과 문제에 천착하여 시를 지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작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박봉우 시인의 성장기를 대략 살펴보면, 1934년 아버지 박병모와 어머니 김효정 사이에서 32녀 중 막내로 태어나 광주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초등학생 때 동요에 입선되기도 하고, 중학생 때 <진달래> 동인을 결성해 문학 활동하기도 했다. 타고난 지질과 일찍부터 쌓은 문학적 소양을 기반으로 고등학생 때에는 청소년 잡지인 <學園>에 글을 투고하다가 1952년에 <石像의 노래>로 주간 문학예술에 당선되었다. 이후 윤삼하, 주명영, 강태열 등과 4인 시집 <상록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정치학에는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성적도 신경을 쓰지 않았고, 1955년에 휴학을 한 후,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휴전선>이 당선된 이후에는 아예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 서울 주재 기자로 취업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1956년 서울 생활을 시작하기 이전의 광주의 성장기는 도처에 남아 있는 한국전쟁의 상흔을 목도하는 사회였고, 극도의 정치적 술수가 난무하는 사회였다. 그가 고등학생 때 이미 문인의 길에 들어섰음에도 대학 전공을 정치학으로 선택한 것은, 확신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기는 어렵지지만 정치를 통해 자신의 이상적인 조국을 구현하고 싶었던 속내를 유추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어찌되었든, 박봉우 시인이 서울 생활을 시작한 1956년부터 서울 생활을 마감한 1975년까지의 기간은 그의 시문학의 절정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419혁명이 미완으로 밀려나고, 516군사쿠데타와 유선독재체제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는 이런 암울한 사회적 환경에서 오로지 시로 조국을 노래했다. 매우 민감한 사회 현실의 문제를 시로 지으면서도 편향된 이념이나 구호는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라고 해서 당면한 정치와 사회문제에 등을 돌리고 청풍명월만 찾아다니는 것은 어쩌면 무책임한 죽은 사회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SNS에 시인들이 보수니 진보니 하는 허상의 진영 논리에 편승하여 편향된 견해를 잡문으로 마구 쏟아내고 있는 작금의 시인상도 제자리를 모르고 날뛰는 일이라 하겠다. 정치의 장에서 정치적 견해를 주장하는 것은 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의 장에서 정치사회 문제를 이야기 하는 방식은 정치의 장에서와는 달라야 한다. 시인은 시로 말하는 사람이다.

시인이 정치사회 문제를 시로 형상화하면 참여시가 되지만, 시로 말하지 않는 주장은 추한 잡문일 뿐이다. 시인의 언어는 시이기 때문이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수많은 시인치고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참여시를 쓰지 않은 시인이 거의 없다. '한 줄의 이미지를 얻는 것은 위대한 사상 체계를 얻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에즈라 파운드는 말했다. 한 편의 시로 그려낸 참여시는 어떤 잡문의 주장보다 소중하다. 박봉우 시인의 많은 시가 참여시에 해당하지만, 아름다운 민족시의 향기를 잃지 않고 독자의 가슴에 울림을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시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봉우 시인의 시어는 소위 상투적인 미사여구나 기교가 거의 없다. 민중 누구나 읽으면 이해할 수 있는 시어를 선택하였지만, 민중의 삶과 유리된 화려하고 달곰한 형용사로 치장한 시어를 꺼내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지금 SNS에서 나돌고 있는 소위 보기 좋고 듣기 좋아 보이는 온갖 형용사를 나열하여 쓴 식상한 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맛이다. 박봉우 시인의 스승인 김현승 시인이 ''그의 시는 광목 폭을 찢어 만든 깃발과 같이 울분과 저항과 애수와 동경을 가득히 안고서 보다 고원한 세대의 언덕을 향하여 펄럭이고 있다''고 칭찬한 것도 이러한 맛을 대변한 말이라 하겠다.

2021년은 박봉우 시인이 <휴전선>을 발표한 지 65, 그가 영면에 들어간 지 36년이 되는 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시정신, 민족의 아픈 상흔을 치유하고, 화해와 포용, 그리고 상생의 빛이 밝은 조국인가?

▲ 서평쓰는 시인 차용국     ©강원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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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예비)후보자 및 그의 배우자, 직계존·비속이나 형제자매에 관하여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거나, 이들을 비방하는 경우 「공직선거법」에 위반됩니다. 대한민국의 깨끗한 선거문화 실현에 동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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