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森의 招待詩 - 눈물의 곳간

林森의 招待詩

림삼 | 기사입력 2023/07/15 [08:24]

林森의 招待詩 - 눈물의 곳간

林森의 招待詩

림삼 | 입력 : 2023/07/15 [08:24]

  © 림삼

 

- 林森招待詩 -

 

눈물의 곳간

 

내 삶의 가운데 자리

지키고 앉아 또아리 튼 슬픔,

 

슬픔에 넌덜머리나서

기쁨 찾으러 간 기도 시간

 

그런데 놀랍게도

정직한 절망으로 슬픈 오늘

살며시 다가와서

위안도 되고, 용기도 되고

의미까지 되어주는 건

 

기세등등 콧대 높은 기쁨이 아니라

은근한 노래 사이 문득 배어나는

저린 슬픔, 너였구나

 

비록 슬프기만 해도

어차피 슬플 수 밖에 없는 거라 해도

해서 슬픈 삶 쭈욱 살아갈 거라 해도

 

내 슬픔

보석마냥 빛 발하는 아침 공간,

내게 보내주는 신앙의 송가

 

하늘에서는 지금 막

슬픔의 노래가 내려오고 있었다

 

- ()의 창() -

 

지면을 통해서 종교에 관련한 이야기는 가급적 금하고 있되, 개인적으로 필자는 기독교인이다. 그것도 소위 모태신앙이라고 불리는 골수분자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기독교인으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이다. 그렇게 추론해보면 이미 70년 가까이 신앙의 연조를 가지고 있으니, 믿음도 또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어야 함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웬 걸? 필자는 아직도 초보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야말로 반쪽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도무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시간적 짬이 도통 나지를 않더니, 나이가 이만큼 들고 나서는 교회 가는 일이 별로 재미도 없고, 신도 안 나서 예배 참석하는 일에 영 게으르다. 하물며 한동안 비대면 예배가 주를 이루는, 코로나라고 하는 거창한 핑계가 있었음에야.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대놓고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처지다. 그저 속으로만 끙끙거리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자라지 못하는 신앙에 전전긍긍할 따름이다. 여간 처량맞고 불쌍한 게 아니다.

 

예컨대 이렇게 뺑뺑이 치다가 삶을 마감할 거라는 건 불 보듯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신앙사랑은 은근히 뜨겁다. 비록 겉으로 들어나는 삶의 지표는 못될지언정,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거나 효시가 되는 삶의 모양새는 드러내지 못하는 폼새지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다가올 내일도 필자의 생활신조는 한결같다. 그저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조금이나마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착한 삶이었으면 하는 이 바람은 오래 묵은 필자의 푯대다.

 

비록 서글프고 고달픈, 그래서 언제나 삶의 곳간에 눈물과 한숨이 꽉 들어찬 보잘 것 없는 여정이지만, 늘 부족함과 못남을 깊이 깨닫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자세가 삶의 좌우명일진대,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는 이 세월에 어찌 자그마한 빛이라도 자체발광하지 못할 손? 그냥 그런 우스운 자위를 하면서 필자는 7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에도 그럭저럭 거룩하게 보낸다.

 

오래 전 어느 간호사의 고백에 가슴이 저렸었다. 아마도 누구라도 거울을 보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으리라 생각하게 되는 고백이었다. - 저는 암 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입니다. 야간 근무를 하는 어느 날 새벽 5, 갑자기 병실에서 호출 벨이 울렸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 호출 벨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환자에게 말 못할 급한 일이 생겼나 싶어 부리나케 병실로 달려갔습니다.

 

병동에서 가장 오래된 입원 환자였습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간호사님, 미안한데 이것 좀 깎아 주세요.”라며 사과 한 개를 쓱 내미는 것입니다.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겨우 사과를 깎아달라니... 큰 일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맥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옆에선 그를 간호하던 아내가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건 보호자에게 부탁해도 되는 거잖아요?” “미안한데 이번만 부탁하니 깎아 줘요.”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었지만, 다른 환자들이 깰까 봐 사과를 깎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심지어 먹기 좋게 잘라달라고까지 하는 것입니다. 할 일도 많은데 이런 것까지 요구하는 환자가 못마땅해서 저는 귀찮은 표정으로 사과를 대충 잘라 놓고 침대에 놓아두곤 발길을 돌렸습니다. 성의 없게 깎은 사과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환자는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래도 전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환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며칠 뒤 그의 아내가 수척해진 모습으로 저를 찾아 왔습니다. “간호사님... 사실 그 날 새벽 사과를 깎아 주셨을 때 저도 깨어 있었습니다.그 날이 저희 부부 결혼기념일이었는데, 아침에 남편이 선물이라며 깎은 사과를 저에게 주더군요. 제가 사과를 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손에 힘이 없어 사과를 깎지 못해 간호사님께 부탁했던 거랍니다. 저를 깜짝 놀라게 하려던 남편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서 죄송한 마음이 너무나 컸지만, 모른 척하고 누워 있었어요. 혹시 거절하면 어쩌나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그 날 사과를 깎아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새벽 가슴 아픈 사랑 앞에 얼마나 무심하고 어리석었던가?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세상 전부였던 그들의 고된 삶을 왜 들여다보지 못했던가? 한없이 인색했던 저 자신이 너무나 실망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제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해주었습니다. “고마워요. 남편이 마지막 선물을 하고 떠날 수 있게 해줘서...” -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사소한 도움이라도 요청한다면 기꺼이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너무 사소하여 지나쳐버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누군가에게 사소한 일이 또 누군가에겐 가장 절박한 일일 수 있다는 것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새삼 머리 속에 맴도는 이유다.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제를 살아내면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심어놓았었을까? 내일 우리에게 주어질 삶의 페이지에 우리는 어떤 의미를 준비하여 채워갈 것인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필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퍽이나 분주타. 답은 없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보헤미안의 여정이, 고달프게 이어지는 집시의 방랑같아서 딴에는 무척 슬프다. 그래서 버겁다.

 

매일 비가 오는 건 아니듯 언제나 슬픔이란 없고, 언제나 괴로움이란 없고, 언제나 힘듦이란 없다고 한다. 어차피 힘겨운 삶 속에서 우리는 종종 넘어지곤 한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봐주는 가족과, 멀리서 응원을 보내는 수많은 마음으로 인해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서로 기대고 격려하면서 세파를 헤쳐 나간다. 그래서 인지상정이다. 더 나은 사람도, 조금 모자란 사람도 하나로 힘을 모아서 고해를 거슬러 내일로 나간다. 그게 만고진리다. ‘헬렌 켈러는 말한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란 말이 있다. 끝마치지 못하거나 완성되지 못한 일이 마음 속에 계속 떠오르는 현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효과는 러시아의 심리학과 학생이던 블루마 자이가르닉과 그녀의 스승이자 사상가인 쿠르트 레빈이 처음 제시한 이론이다. 이 효과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계기는 무척 흥미롭다.

 

자이가르닉이 식당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종업원들을 보던 중 흥미를 끄는 장면을 포착한다. “저렇게 수많은 손님들로부터의 주문을 받는 웨이터들은 어떻게 헷갈리지도 않을까?”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자기 음식을 날라다준 웨이터에게 조금 전 옆 테이블에 갖다놓은 메뉴가 뭐였냐고 물었다. 그런데 웨이터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스스로도 당황해하는 것이었다.

 

자이가르닉은 이 부분에 착안해 연구를 시작했다. 한 그룹은 일을 끝내도록 설정하고, 다른 그룹은 일을 끝마치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실험을 한 결과 업무 종료 후, 일 도중에 방해를 받은 그룹이 자신이 수행한 업무에 대해 더 잘 기억했다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 완결되지 않은 문제는 계속 기억에서 떨쳐내지 못하는 반면, 마무리 지은 일은 기억에서 깨끗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시험에서 틀린 문제를 더 오래 기억하거나,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 혹은 지나간 연인을 안타깝게 잊지 못하는 것 또한 자이가르닉 효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이란 때로는 도저히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신비로운 현상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른바 텔레파시의 교감이라든지, 영적 교류나 시공을 초월한 소통 같은 불가사의한 결속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형이상학적인 형상이나 사차원의 세계에서 볼 수 있을 모호한 실체를 느닷없이 드러내보이곤 한다. 소위 매직아이를 능가하는 착시현상을 유도하기도 한다. 삶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증빙이 우리를 새삼 놀라게 한다.

 

필자는 이 아침에 사고한다. 써놓은 글이라는 게, 주어진 삶의 모습들을 시간이라는 매체를 통해 늘어놓는 필자의 하찮은 넉두리에 불과하겠지만, 어차피 주어진 의무가 글을 쓰는 일이라면 중구난방으로 휘갈겨진 이 글들이, 세상을 치열하게 사는 다른 어떤 사람들의 삶의 곳간에 조금이라도 필요한 정신의 일용 양식이 되어지기를 소박한 마음으로 바란다. 그래서 심사숙고한다. 가능하다면 지금 보다는 낫게, 글 좀 잘 써보려고 잔머리 열심히 굴리고 있다.

 

  © 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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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선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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