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쉬운 삶의 법칙이다. 인간은 밝을 때 깨어 해를 보고 하루를 시작하고, 어둠이 짙어 올 땐 잠자리에 들어 낮 동안 사용한 몸이 스스로 재생하고 복구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어야 한다. 그와 반대로 산다는 건 그 단순한 법칙을 거슬러 몸을 아프게 하고 나중엔 정신마저 피폐하게 만들고 만다. 이렇게 단순한 원리를 지키지 못해서 서점에는 왜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 적어놓은 수많은 책이 널찍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이 그 시작이었을까. 어쨌든 아직도 그런 류의 자기계발서는 잘 팔린다. 왜 그럴까.
어려우니까.
어려우니까 그런 거다. 박명수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새는… 피곤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를 좀 더 주워 먹을 수 있다는 원래 속담과는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새는 그만큼 더 피곤하다. 겨울이 되면 더 그렇다. 이불은 우리를 자꾸만 ‘좀만 더 있다 가라’고 유혹한다. 그 유혹은 다른 어떤 유혹보다 달콤하고 밀쳐내기가 힘들다. 해를 보고 눈을 떠야 하는 게 인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법칙인데, 어쩜 그렇게 아침을 깨우기는 힘든 걸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항상 6시만 되면 일어나는데, 나도 사람이라 아침에 일어날 땐 늘 괴로웠다. 지금도 종종 그렇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 출퇴근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더욱이 내 일터가 내가 사는 건물 1층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꼭 일어나는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걸까. 나는 왜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해야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서.
젊은 사람들은 척척 다루는 컴퓨터 프로그램. 그리고 급속도로 변화되는 다양한 콘텐츠들. 나는 못 하고 못 보는 게 많다. 잠을 양보해 남들보다 못하는 것 뒤처지는 걸 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인정해버리면 생각보다 그것을 채우기가 쉬워진다. 인정할 때만이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방법을 찾을 시도도 가능해진다. 남들이 1시간이면 될 것을 나는 2시간, 아니 그보다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땐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건 허물이 아니라 솔직함이다. 솔직해야만 성장할 방법을 제대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꼭 새벽일까.
새벽에는 나밖에 없다.
전화하는 사람, 나를 부르는 사람, 찾는 사람이 없다. 그 시간 만큼은 철저하게 나만의 시간이다. 오늘은 나의 어떤 부족한 부분을 채울까. 분명 나의 못난 부분 내가 잘 못 하는 부분과 마주하는 시간인데 이 시간이 이토록 설레는 이유는. 이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성장하게 될 내 모습을 나 자신은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난 ‘아 뭐야, 이런 것도 못 해.’ ‘왜 이렇게 태어났어!’ 대신 ‘오호, 생각보다 이런 게 좀 안 되네. 좀 더 해봐야겠네.’ 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 자꾸 강조하게 되지만, 그걸 시도하고 채우는 시간으로 새벽만큼 좋은 시간은 없다.
뭐가 잘 안 된다고 화부터 내지 말고. 생각보다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말고. 잘 안 되니까 좀 더 해보라고, 못하니까 자꾸 시도해보라고, 그러라고 내게 주어진 시간. 그게 삶이다. 우리는 충분히 빛나고 있다. 빛나지 않아서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괜찮고 싶어서 노력하는 거다. 꽤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건 한 끗 차이다. 시원하게 나를 인정하는 거, 받아들였다면 한번 시도해보는 거다. 그래 보지 않고 어렵다고, 너무하다고, 힘들다고 하면 반칙이다. 정정당당하게, 페어플레이. 그게 삶의 가장 기본 원칙이다. <저작권자 ⓒ 강원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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