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바람의 길
길을 떠났던 바람이 폭풍의 언덕을 넘고 숨 멎은 강을 건너 꽃사슴이 떠난 들판을 지나 키 작은 소년의 옷을 입고 돌아왔다
태어나 아무 것도 못해보고 돌아와 누운 것이 실패인 것 같아서 나즈막이 울던 바람이 목을 놓았다
폭풍우 지나간 언덕에는 벚꽃잎이 지천으로 덮이고 검붉은 강에는 상류로 돌아간 연어가 남겨놓은 은비늘만 윤슬로 빛나고 들판을 떠난 짐승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흐르는 강에 길이 있다는 건 그곳에 마음이 간다는 것 바람에 길이 있다는 건 살면서 받아내는 압박이 너와 나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
이파리 하나 남기지 않은 빈 몸뚱이어서 휘감아 도는 바람은 거칠 것이 없다
다시 불어오는 바람에 여전히 말이 없는 바람에 묻는다 너는 어디로부터 와 어디로 가느냐
- 바람의 길 -
60. 희생양
식솔을 볼모로 삼고 조상을 욕보이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니 천하장사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네
나 하나 제물 되어 세상만사 편해지면 백골이 진토가 된들 수백 번을 고쳐 죽은들 남을 원이야 있을까만
대장부로 태어나 기개 한 번 못 펼치고 역사의 죄인으로 형장의 이슬로 스러져가기에는
충정으로 품은 열정 태양보다 뜨겁고 바다보다 깊으니 오간 데 없는 허상 하나 붙들고라도 연옥의 고통을 다 받아내련다
- 희생양 -
연수가 열흘간의 첫 중국 출장 특감을 비교적 무난하게 마치고 복귀한 뒤, 감사 총서라고 할 수 있는 감사결과보고서 작성과 최고경영층에 보고할 최종 보고자료를 점검하고 검토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오후에 연수는 김윤오 차장으로부터 뜻밖의 안 좋은 소식 하나를 들었다
이한경 상무를 본사에 복귀시키는 인사발령 품의서가 중국 사업 총괄본부장인 왕영홍 부회장의 결재를 받아 그룹 인사실에 접수되었다는 것이었다
발령의 명분은 지속되는 중국법인의 부진에 대한 책임과 함께, 인건비 절감을 위한 중국 현지의 인력감축이라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국법인 총경리인 한길 부사장은 그 책임이 거론되지는 않았고, 이한경 상무가 그동안 중국법인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마무리와 함께 가족들의 귀임준비 기간을 감안해 주어서 한 달간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김윤오 차장의 연락을 받고 나니 연수의 머리를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한경 상무의 이상일 전무와의 껄끄러운 관계였다
이한경 상무는 이상일 전무의 리베이트 의혹사건 연루와 관련하여 연수와 계속 연락과 협의를 하면서, 이전무의 동태를 살피고 법인의 기획본부장으로서 그의 수상한 업무처리 내용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한경 상무의 견제와 연수의 지난 중국 출장 특감에서의 협력업체 리베이트 의혹사건 조사가 이상일 전무의 귀에도 흘러 들어가면서 이한경 상무와의 신경전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소식을 연수도 들은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해도 아마 위기의식을 느낀 이상일 전무가 왕영홍 부회장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하고,
분노한 왕영홍 부회장이 이한경 상무를 괘씸하게 여기고 본사로 복귀시켜 눈엣가시를 뽑아버리려 생각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연수의 중국 출장 특감보고서는 아직 최고경영층에 보고되지 않았고 대략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여상동 전무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수도 중국사업본부의 일이긴 해도 태스크포스는 그룹기획실의 감사팀 소속이기 때문에 연수의 중국사업본부 상사인 진대기 사업부장이나 왕영홍 부회장에게는 따로 특감과 관련해서 보고한 내용이 없었으므로 연수는 아직 그들에게 한 발자국 비켜나 있었고, 결국 왕영홍 부회장이나 이상일 전무의 공격 타겟은 이한경 상무가 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행히 왕영홍 부회장은 지금 중국 사업의 부진으로 인해 “전진 배치”라는 이름으로 중국 현지에 나가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본사에는 두 달째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왕영홍 부회장이 최고경영층에 보고되는 연수의 특감보고서 내용을 인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그렇게 되면 다음 타겟은 연수나 여상동 전무가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연수는 바로 여상동 전무에게로 가서 그의 사무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무는 데스크탑 모니터를 응시하며 무언가를 보고 있다가 연수가 들어서는 걸 보고 마침 잘 왔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흔들며 그의 원탁 테이블 자리로 연수를 안내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장상무도 이한경 상무의 인사발령 관련 소식을 들었나 보군요."
여전무도 이한경 상무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네. 그래서 그 문제를 전무님과 상의하려고..."
"그렇지 않아도 그 일 때문에 장상무한테 연락을 하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장상무는 이상무에 대한 귀임 발령 의뢰 건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왕영홍 부회장이 부임한 지 이제 갓 일 년 정도 된 이상무를 귀임시키려고 한다는 건 이상무가 그의 눈 밖에 났다는 겁니다.
아마 이상일 전무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는 이한경 상무를 이전무가 못마땅해하거나 뭔가 눈치를 채고 사전에 싹을 자르려고 술수를 부린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내 생각도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말인데 이번 출장보고서 정리는 언제쯤 마무리될 것 같은가요?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네. 저희 기현팀 보고서는 거의 다 끝나가고, 최종적으로 정합성 검토와 관련 증빙자료들을 챙기고 있습니다.
감사 결과보고서는 아마 다음 주초에는 전무님께 보고드릴 수 있을 것 같고,
전무님께서 기획조정본부장이신 김용국 부회장님께 보고가 완료되면 최고 경영층께 보고드릴 최종보고서는 김용국 부회장님의 의견을 담아서, 바로 완성된 보고서를 상신할 수 있도록 지금 같이 작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보고서 내용이 그토록 빨리 완성이 된다니 다들 수고가 많았겠네요. 아무튼, 지금은 속도가 중요하고 뭐가 됐든 속전속결로 해야 합니다.
이한경 상무의 귀임까지 한 달 정도가 남았으니 이상무를 구제할 수 있는 기회 역시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자칫 늦어지다간 이한경 상무도 구제해줄 수 없을뿐더러, 장상무나 나도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최대한 서둘러 봅시다."
여상동 전무는 연수가 하고 싶은 얘기를 자신이 먼저 하고 있었고, 연수는 다시 한번 여전무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여전무에게 감사해했다
註 : 본 시소설은 가상의 공간과 인물을 소재로 한 픽션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강원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